북파공작원은 국가의 파시즘적 폭력
스크롤 이동 상태바
북파공작원은 국가의 파시즘적 폭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 본 분단의 아픔, 북파공작원

강우석 감독의 새 영화 ‘실미도’는 1971년 북파 공작원 31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 제작진이 북파공작원을 양성했던 '실미도 부대의 추모제'를 4월 30일 마련했다.

실미도에서 열린 이날 추모제에는 영화 관계자와 취재진 외에도 실미도 부대에 소속 되었던 ‘실미도 전우회’ 회원들이 참석했다. 냉전과 분단의 희생양이었던 북파공작원의 이야기를 관객들은 오는 11월이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실미도’ 북파 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 중

^^^▲ 강우석 감독의 신작 '실미도'가 30일 실미도에 지어진 세트를 공개하며 제작고사 및 추모제를 가졌다.
ⓒ nkino.com^^^

2002년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영화 ‘예스터 데이’, ‘아유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의 연이은 실패는 한국 영화판의 흐름을 코미디로 돌려놓았다. 무엇보다 제작자들이 코미디를 선호하는 이유는 저렴한 제작비와 비교적 수월한 일정 수준의 흥행 보장 등이었다. 코미디로 편중된 한국영화판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강우석 감독이 영화 ‘실미도’로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러한 분위기의 충무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 ‘실미도’는 최대 100억원 가량의 제작비가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김신조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정권이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범죄자들로 비밀리에 구성했던 북파 특수부대의 실화를 그리고 있다. ‘공공의 적’(2001)으로 건재를 과시했던 강 감독은 이 영화의 배경으로 실미도를 택했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 목을 따는 것’이 소원인 이정진 역에는 설경구가, 그의 동료 부대원 금재와 원희 역에는 허준호와 임원희가 나섰다. 이들을 담당하는 북파공작 교육대장 역에는 안성기가 출연한다. 연기파 배우들로 구성된 캐스팅과 더불어 이 영화에 또 하나 신뢰를 주는 것이 있다. 헐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인 컬럼비아 사가 한국영화에 최초로 본격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다시는 불행한 역사 반복되지 않았으면”
실미도 전우회 회원, '실미도 부대 추모제' 참석

“다시는 슬픈 역사가 없었으면 좋겠고 우리 같은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4월 30일 실미도에서 마련된 추모제에 참석한 김방일(58) 씨는 옛일이 생각나는 듯 굳은 표정으로 회한에 잠겼다. 반백의 머리를 한 대여섯 명의 중년 남자들도 김 씨와 함께 였다. 이들이 바로 실미도 부대에 소속되었던 ‘실미도 전우회’ 회원들이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 씨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68년 4월에 창설되어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간첩의 침투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창설 후 3년 4개월 동안 ‘지옥훈련’을 받은 부대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의 그것'이었다.

71년 8월 부대원들은 하극상을 일으켜 기간병들과 소대장, 교육대장 등을 사살했다. 섬을 탈주한 이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중 일부는 수류탄으로 자폭했고, 일부는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 씨는 “사건이 일어난 후 3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실미도를 찾았다”고 밝혔다. 운명의 비극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71년 8월 22일 업무를 보기 위해 섬을 벗어났던 김 씨는 복귀할 계획이었다. 그런 김 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약혼자였다. 친척이 왔다는 약혼자의 전화를 받아 하루 더 외출을 허락 받았고, 그로 인해 운명의 비극은 김 씨를 비껴갔다.

김 씨는 사건이 일어난 날 부대를 찾았을 때 상황을 “섬에 들어와보니 바닷가나 내무반이나 연병장이나 곳곳이 시체 천지였고, 탄약고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라고 전했다. 당시 실미도 부대의 분위기를 묻자, 김 씨는 “일부 언론에서 ‘악마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면서 “지금과 달리 당시 상황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국가에 충성하려던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민간인을 차출 북파공작원으로 침투시킨 행위는
'명백한 국가의 파시즘적 폭력'

2000년 7월 베일에 감춰져 있던 북파공작원의 실체가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군 정보사령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전쟁 이후 북파됐다가 북한 당국에 붙잡히거나 실종, 사망한 공작원은 확인된 수만 7,726명이며, 정보사령부에서 이들 실종 공작원의 개인파일을 기록해 보관 중”이라고 밝혀 충격을 줬다.

무장공작원의 파북은 한국전쟁 기간은 물론,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 이후로도 계속되어 왔다. 특히 휴전선 인근의 국지적 충돌이 잠잠해진 60년대에 들어서도 공작원 파북은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 실종, 사망한 북파공작원도 2,150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12년 동안 한해 평균 180명의 공작원이 북한 땅에서 죽거나 실종됐다고 말해주고 있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기 전까지 북파공작원이나 그 가족들은 비통을 눈물을 삼켜야 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북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해와 공로에 대해 국가가 보상하라”고 나섰지만,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중적으로 국방부는 “북파공작원의 존재와 유공이 분명한 만큼 음지에서의 조용한 보상이나 해결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범죄자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차출하여 북파공작원으로 훈련, 침투시킨 정부의 행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이야말로 국가의 파시즘적 폭력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새 영화 ‘실미도’의 추모제 현장은 아직도 분단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