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마 같은 논길에서 쑥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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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마 같은 논길에서 쑥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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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22>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갯버들실뱀처럼 흐르는 냇가에선 갯버들이 피어나고
ⓒ 우리꽃 자생화^^^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 에서도 "가르마 같은 논길" 에서도 파아란 쑥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냉이가 갸냘픈 몸매를 드러내며 수줍은 듯 허리를 비틀고 있습니다. 씀바퀴가 앞섶을 풀어헤치고 포근한 햇살에 안깁니다. 그 춥고 어두웠던 겨울을, 서러움에 가슴을 탕탕 쳐도 어쩔수 없었던 절망의 나날을 밀쳐내면서.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 에 파아란 보리가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 고 그 누군가의 부푼 희망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습니다.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아리처럼 촐싹거리며 우쭐대고 있습니다.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 그 들판이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흙을 밟고 싶습니다. 맨발로 달려나가 호미로 그 부드러운 흙을 갈고 싶습니다. 그녀의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 습니다. 그러나 "다리를 절며" 진종일 걸어도, "봄신령이 지펴" 내 온몸에서 풋내가 나도, 내가 호미를 쥐고 땀을 흘릴 그 보리밭이 없습니다. 그 들판이 없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들판과 보리밭과 종다리와 나비와 제비와 맨드라미와 들마꽃도 모두 남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억지에 의해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제는 봄이 와도, 봄이 와서 그 들판을 푸르게 푸르게 물들이면 물들일 수록 시인의 가슴은 더욱 시려옵니다. 왜냐구요? 그 들판은 이미 남에게 빼앗긴 들판이니까요.

이 시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국을 빼앗긴 아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들이 있어도 내가 땀 흘리며 농사를 지을 그런 들이 없습니다. 봄이 와도, 봄이 와서 들판 곳곳에 새로운 생명을 심어도 시인의 마음 속에는 결코 봄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봄빛이 푸르면 푸를 수록 시인의 가슴은 더욱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이 시를 더욱 의미 있게 감상하려면 빼앗긴 들판을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나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내 어머니로 생각하고 읽어보십시오. 금세 가슴 깊숙히 다가오는 서러움에 목이 메일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내 부모님, 내 형제와 누이가 강압에 의해 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분 단장을 한 채 그들의 품속에서 애처롭게 봄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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