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꿩의 바람꽃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꽃처럼 ⓒ 우리꽃 자생화^^^ | ||
지금으로부터 대략 3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일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마을에 나타나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거리 연극의 대명사가 바로 남사당 패거리였습니다. 이 남사당 패거리들의 남루하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을 언뜻 바라보면 마치 팔도의 각설이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일정한 때가 되면 마치 연중 행사가 열리는 것처럼 마을을 찾아오는 남사당 패거리들은 일년 내내 살아도 새로운 볼거리가 전혀 없었던 시골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주었습니다. 또한 가난에 찌들어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폭소를 전해주는 신선한 삶의 자극제였습니다.
이들이 노래와 함께 주로 하는 거리 연극은 "홍도야 울지마라" "춘향전" "심청전" 등 주로 우리 대중가요를 각색하거나 우리의 고전을 각색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악극 혹은 신파극이라고 불리우며 주로 극장가나 특별한 장치가 마련된 썩 괜찮은 그런 무대에서나 그런 극을 볼 수가 있지만요.
하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는 그런 특별한 무대가 없었습니다. 남사당 패거리들이 엄청나게 큰 천막에서부터 무대시설물, 앰프, 조명 등을 준비하여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이나 마을의 마른 논바닥에 가설무대를 설치했습니다. 간혹 4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장터 한 귀퉁이에 가설무대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배역 또한 주인공을 빼고는 대부분 여장을 한 남자 혹은 남장을 한 여자가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간살스런 목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의 배꼽을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극을 시작하기 전이나 극 사이 사이에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신비의 영약(?)을 팔았습니다.
"자~ 비암이요, 비암!"
"에그머니나!"
"에그! 징그러"
"이 비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백두산에서 3년, 태백산에서 2년, 지리산에서 5년, 도합 10년을 묵은 진짜 산삼 같은 비암이올시다"
"자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이 시를 읽으면 어린 날의 그 우스꽝스런 추억 한토막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관객의 입장에서만 남사당 패거리들의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늘 관객 앞에 서서 익살과 웃음을 지어야하는 바로 그 남사당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늘 즐거움 속에서만 살아갈 것만 같은 그 남사당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모르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면서 익살과 웃음과 춤과 노래와 연기를 해야 하는 남사당 패거리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은반지를 사주고 싶은/고운 처녀도 있었건만/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처녀야!/나는 집시의 피였다./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다음 날 새벽이면 또다시 "노새의 뒤를 따라/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남사당 패들의 역마살 낀 운명. 그렇게 동구 밖을 나서면 또 어디선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슬픔과 기쁨이 섞여" 피어납니다. 그리고 또 마을에 이르면 다시 한번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아니, 향단이가 되어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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