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보다 짠 인생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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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보다 짠 인생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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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9> 김용호 “주막(酒幕)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매화꽃잎이 함박눈처럼 하얗게 휘날리는 봄날 오후, 이상하게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후울쩍 목적지도 없이 그냥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가끔 불어오는 포근한 봄바람에 서럽다, 서럽다, 며 흐느끼는 저 매화꽃잎처럼 말입니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봄노래를 들으려고 이리저리 돌려놓아도 낡은 라디오는 빈 집에 숨어든 쥐새끼처럼 여전히 찌직거리기만 했습니다. 도랑물 흐르는 소리처럼 맑게 흘러내려야만 하는 봄노래 또한 내 불안한 인생처럼 여전히 찌직거리기만 했습니다.

 

 
   
  ^^^▲ 마산 큰대포집에서낯 선 마을 목로주점에서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
ⓒ 이종찬^^^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버스정류소가 있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가벼운 눈인사만 건네며 매화꽃잎을 휩쓸고 다니는 봄바람처럼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걸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한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애궂은 하늘만 자꾸 올려다 보며 한 시간여를 기다려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버스 안에도 가끔 낯 익은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또 한번 가벼운 눈인사만 건넨 채 차창 밖으로 눈을 던졌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에는 온통 노오란 개나리들이 떼지어 피어나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심어진 벚나무 가지마다 올망졸망한 꽃눈들이 매달려 금세라도 툭,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버스가 설 때마다 무심코 내렸고, 또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올라탔습니다.

어디로 갈까? 어느새 시외버스 주차장에 내린 나는 가까운 시골로 가는 버스표를 샀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곳의 버스표를 말입니다. 그래,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냥 내리자. 버스가 닿는 시골 어느 마을인들 주막집 하나 없으랴. 그랬습니다. 아마도 그날 저는 낯선 곳으로 가서 낯 익은 풍경을 찾으려 애썼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무턱대고 내린 그곳에도 어김없이 버스길 옆에 주막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대포' 란 큼지막한 글씨가 때 낀 유리창에 새겨진 그런 주막집이 말입니다. 나는 "위엄 있는 송덕비"가 하나 떡 버티고 있는 그 마을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불쑥 주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주막 안에는 여느 주막처럼 사람들 몇몇이 이 빠진 사발에 철철 넘치도록 부어진 막걸리 잔을 마주 하고 있었습니다. 제법 젊게 보이는 사람들은 의자 위에 보퉁이 하나씩 올려놓고 삿대질까지 해가며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습니다. 한 구석에는 60대 남짓한 촌로들이 반쯤 남은 자신의 막걸리잔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지메! 여기도 막걸리 한 잔 주이소"
"예에~ 근데 오데서 오셨능교? 낯 선 분이시네"
"아, 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 마을 경치가 하도 좋아가꼬 잠깐 내렸지예"
"근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네예?"
"크~ 이 집 막걸리 맛이 참말로 기똥차네"

그날, 나는 "소금보다 짜다는/인생을 안주하"고 있는 촌로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붉으스럼한 얼굴로 문득 주막을 나서니, 주막 밖에서도 내 얼굴 같은 바알간 노을이 꽃물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주막집을 바라보니 아까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낯선 사람 하나가 앉아 내가 마셨던 그 이 빠진 막걸리 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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