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재직 시의 반역-간첩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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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재직 시의 반역-간첩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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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시 북과 간첩이 바라는 행위를 직접 한 것이다

▲ ⓒ뉴스타운

1. 한국 환자들은 죽든 말든 결핵백신 싹쓸이해 북한에 상납

2001.10.10. 김대중 정부는 30만명 분에 해당하는 결핵백신을 북한에 비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국내에 한동안 결핵백신 공백사태가 이어져 국내 접종자들이 백신을 맞을 수 없어 전국 보건소에서 한동안 소동이 벌어 졌으며, 결핵연구원은 이 같은 사실을 외부에 노출하지 말 것을 전국 지부에 통보했습니다(증23). 북한에 몰래 주고 입단속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2001.11.27. 동아일보 사설은 “약 없다고 방치하는 나라”라는 제하에 “북한엔 있는 대로 다 퍼다주면서 국민건강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파스’ 공급이 중단되면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내성이 강해진 결핵균이 퍼져 다른 사람들의 건강까지도 위협하게 된다. 더욱 큰 문제는 국내 10만여 결핵 환자 가운데 1만여 명에 이르는 만성 중증환자들은 대부분 극빈층이라는 데있다.”(증27)며 국내 환자들을 팽개쳐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도 북한에는 사정없이 퍼주고 있다는 사실을 질타하였습니다.  

2. 대공수사, 대공정보획득 요원 초토화

국내 대공수사요원들을 집단으로 해체하였습니다. 김대중은 집권 33일만인 1998.4.1.에 국정원 대공요원 581명을 강제 해고하고, 민변출신 변호사 등 500여명을 검증절차 없이 특채 하였고, 대공경찰 2,500명, 기무사 대공요원 900명, 공안전문 검찰 등을 대량 해직시켰습니다.(증28) 2010.1. 국정원은 김대중 정부가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는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증29). 

3. 군 침투한 죄익세력 현황 보고서 쓴 보안사 장군, 기체 내에서 파면

월간조선 2001년 8월 호는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기무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대한 내막을 밝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북한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런 마당에 왜 군대가 필요한가?”(증30, 1쪽 상단).  

“나에게 총알이 지급되면 우리 부대의 지휘관부터 먼저 쏘겠다”는 적대적인 발언을 하는 병사도 있다.(증30, 3쪽 2-4줄).  

기무사는 이 자료의 序頭(서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北이 적화통일 야욕을 버렸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고 적시, 정부와 견해를 달리하고, 「軍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남조선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北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軍에 침투한 좌익세력들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노골적인 軍 무력화를 꾀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며 발간 취지를 밝혔다.(증30,1쪽 하단).  

이 자료는 ▲좌익세력의 對軍 투쟁의 역사적 맥락과 ▲좌익세력의 對軍 투쟁 실상 등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좌익세력의 對軍 투쟁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광복 직후인 1946년에 발생했던 「大邱(대구) 군부 프락치 사건」에서부터 麗順(여순)반란 사건, 그리고 6ㆍ25 전쟁 이후 최근까지의 좌익사건을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자료에 따르면 좌익세력에 의한 軍 無力化 시도는 조선공산당 당원이 국방경비대(1946년 1월15일 창설된 국방부 前身)에 침투한 1946년의 「大邱(대구) 군부 프락치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프락치들이 1946년 10월1일에 발생한 大邱 폭동사건의 배후 지원세력이었다고 이 자료는 단정지었다. 기무사는 이 자료에서 북한 金日成(김일성)이 1966년 10월 노동당 제2차 대표자 회의에서 『남조선 혁명조직들과 혁명가들은 「국군사업」을 잘 해야 한다』고 교시했다고 소개하고, 軍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남조선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게 북한의 對南 적화통일 핵심 전략이라고 밝혔다.(증30, 1쪽 하단-2쪽 상단). 

한토마(한겨레 토론마당)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로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을 소개하였습니다. 좌익이라면 눈에 불을 켰던 조성태 장관은 2001년 3월에 좌익으로 알려진 김동신 장관으로 교체되고, 6월 30일 위 보고서를 작성한 대공처장 염완돈 준장이 전격 경질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6.15 이후 군의 좌익활동 즉 대군와해작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자료 작성에 관여했던 기무사의 한 간부는 『검거한 좌익사범 중 대표적인 활동 사례 몇 가지만 언급했다, 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가 파악하기로 軍內에 침투한 좌익세력은 1,000여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 핵심부에도 북한 金正日(김정일) 추종세력이 있다는 첩보와 정보를 갖고 있으나 이것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어서 자료에 언급하지 않았다. 일부 시민단체에 상당히 침투해 있는 좌익세력들에 대해서는 자료에 일체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에서 내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북한의 「피바다」를 극찬한 국방일보에 대해서 기무사가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기초자료 수집에 착수하다가 北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軍 수뇌부의 분위기 때문에 수사를 그만 둔 적도 있다』고 말했다. 기무사가 이런 내용의 자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자료를 만든 주무부서인 기무사 對共처장이 지난 6월30일 갑자기 전역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증31, 2쪽 중간).  

趙成台 장관의 뒤를 이은 金東信(김동신) 장관 체제의 軍 수뇌부가 이 자료의 제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기무사 한 고급 장교의 말은 더욱 상징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좌익세력의 對軍 침투 실상은 올해 초 趙成台 국방장관에게 처음 보고되었습니다. 趙장관은 보고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全지휘관들에게 배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趙成台 국방장관은 좌익세력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월 개각 때 새로 취임한 金東信 국방장관은 기무사 보고 내용자체를 처음엔 소극적으로 생각하다가 전임 장관의 지시에 따라 책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全軍지휘관 회의 때 발표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金東信 장관 부임 후, 軍 수뇌부는 北을 자극하는 일이라면 소극적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北이 우리의 主敵이란 점을 분명히 밝힌 趙成台 장관은 재임 기간 내내 北으로부터 反통일세력이라는 흑색선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金東信 장관 부임 이후 金장관에 대한 北의 비방 선전은 별로 없었습니다. 6ㆍ25 전쟁 때 체포된 빨치산과 남파간첩 가운데 전향하지 않은 죄수들을 北送할 때 그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준 사람이 金東信 장관임을 유념해야 합니다.”(증31, 3쪽 상반부). 

4. 동의대 경찰관 태워죽인 주모자에게 민주화유공자 등극 시키고 6억원 보상금 줘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폭력이 발생했습니다. 과격학생들은 경찰관 7명을 신나로 불태워 죽였습니다. 주동자는 당시 무기징역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002년 4월, 민보상위는 이 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했습니다. 가장 악랄했던 주동자에게는 당시 화폐 6억원이 보상금으로 지급되었습니다. 당시의 노태우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이었고, 경찰은 그 주구 였기에 그들을 죽인 것은 민주화 열사라는 것이었습니다.(증32).  

5. 베트남전에 한국군 참가한 것, 베트남 주석에 사과

2001.8.23. 김대중은 방한중인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한국이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는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찬전용사들의 명예을 이렇게 손상시켜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6.25 참전 16개국 정상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북한 국민에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한 것과 같은 엄청난 일로 참전용사들의 가슴과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증33). 

베트남전쟁은 당시 팽배해 있던 아시아 공산화 도미노를 저지시키기 위해 313,000명의 장병이 참전해서 4,960명이 전사하고, 10,962명의 부상자와 66,000명의 고엽제 호소자를 냈던 반공전쟁이었습니다. 이런 명에서 김대중의 이 발언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앞에서 1960년대의 반공국가 대한민국을 무릎 꿇린 일대 반역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김대중은 2001.10.1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군과 국가를 욕보이는 망언을 하였습니다. “6.25는 성공하지 못한 통일시도 였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사설(증34)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6.25 전쟁을 통일시도로 보는 것은 6.25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6.25는 엄연히 무력을 통한 통일시도였기에 이러한 언급은 북한의 시각에서 출발한 인식이 아닌가 우려 마저 갖게 한다.” 구소련의 사주를 받아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기 위해 5백만을 희생시켜가면서 일으킨 비극적인 전쟁을 놓고 김대중은 북한의 입장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김대중 정부는 6.25를 실패한 통일전쟁으로 규정하고, 일방적인 대북지원을 하는 등 일련의 정책들이 다분히 좌파적 정책으로 비쳐져 국민이 불안해하는 게 사실”이라 비판했고, 남경필 대변인은 “현 정부는 준비 안된 좌파적인 정책으로 대중을 끊임 없이 선동 기만해왔다”고 비판했습니다.(증34-1). 

6. 러시아에 북한이 진 빛 탕감해주면 한국이 러시아에서 받을 돈 안 받겠다 제의

신동아 2000년 10월호는 참으로 충격적인 기사를 썼습니다.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14억7,000만 달러를 받을 것이 있고,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약 40억 달러(38억 루불)를 받을 것이 있는데 김대중이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러시아에 인맥이 있는 이병화 박사’를 거간으로 하여 한국도 러시아로부터 받을 돈을 포기 할테니 러시아도 북한으로부터 받을 돈을 포기하자는 제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증35 상단부분).  

7. 북한의 핵개발 사실 알고도 적극적 은폐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우라늄 개발사실을 알고서도 은폐해왔습니다. 2002.11.17. 미국은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시인 했다고 발표했습니다.(증36, 1쪽 11줄). 2010.11.21. 지그프리드 해커 스탠포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이 2010.11.9-13. 방북 당시 영변에서 수백개의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것을 목격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증36, 4쪽 하단). 북한은 해커 박사에게 원심분리기 2,000개가 있다고 밝혔고 이는 해마다 20kg급 원자탄을 2개씩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평가들 했습니다.(증37, 2쪽)  

2010.11.23. 조선일보는 김대중의 우라늄 은폐지시를 보도했습니다.

“이날 정부 고위관계자는 ‘실무선에서는 1998년부터 북한의 농축장비 반입 등을 알았지만, 2002년 이를 부인한 것은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연계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2002년 10월 HEU 사태 당시에는 윗선 지시로 축소.은폐되었다는 것이다.”(증38)  

2010.11.23. 청와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HEU 개발을 알고도 은폐했다며 해명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증39, 1쪽). 정진석(사진) 청와대 정무수석은 23일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인사들이 우라늄 핵개발 의혹에 대해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북한 편을 드는 주장을 했는데 지금이라도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정세현·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미국의 정보에 대해 부정하는 발언을 해온 게 사실”이라며 “이제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가동해 온) 사실이 밝혀 졌기에 정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은 1998년부터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전(前) 정권이 부인한 것”이라며 “부인한 이유는 HEU 프로그램 가동 자금이 햇볕정책에서 나온 것 아니냐는 지적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증39, 1쪽). 

8. 북한은 핵개발 의사도 능력도 없다.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김대중은 2001년 북한의 핵개발을 적극 카버해주었습니다.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대북지원금이 핵개발에 악용된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증40 하단, 증41 하단) 

9. 통일부 발표 : 김대중이 북한에 건네 준 돈과 물자 69억 달러

2010.11.8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대북지원금이 ‘핵무장에 이용된 의혹이있다”고 밝혔습니다. 통일부는 현금으로는 29억 달러, 현물을 합치면 69억 달러가 북으로 갔다 합니다. 이 중에는 정상회담 대가 4억 5천만 달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증42). 이명박 대통령은 2009.7.3.에도 영국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북한을 많이 지원했는데도 불구, 북한은 결과적으로 핵무기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대북 신뢰도는 많이 후퇴했다”고 발표 했고.(증43, 7-9줄),  

7.7.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지원했으나, 그 돈이 북한 사회의 개방을 돕는 데 사용되지 않고 핵무장 하는데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증43, 2-3줄)는 발언을 했습니다. 2009.7.8. 세계일보는 사설 “지난 10년 대북지원금 핵무장 의혹 있다”는 제하에 “지난 10년간 방식은 평화를 돈으로 산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핵무장만 도운 꼴이 됐다. 이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는 퍼주기식 햇볕정책의 폐기를 선언한 의미가 있다”고 평했습니다.(증44 중간).  

10. 정상회담(접선) 직후 지뢰제거에 미쳐 날뛰어

김대중은 평양 방문 직후 군은 지뢰제거 장비를 해외로부터 성능시험을 할 기간도 없이 긴급 수배-긴급 구매 하면서까지 무엇에 홀렸는지 지뢰제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000.9. 43억원의 예산을 들여 독일 및 영국으로부터 3대의 지뢰제거장비 3대를 긴급 구매하였지만 2대는 도입 즉시 사용이 불가능했고 사용가능한 장비는 1대였지만 그나마 곧바로 북한에 념겨주고 우리는 또 다시 구매하기로 하였습니다.(증44). 군사안보를 위해 깔아놓았던 휴전선 지뢰를 아무런 분석 엾이 대통령의 명령 하나로 제거한다는 그야말로 패닉이었습니다. 지뢰를 제거해야 하느냐는 데 대한 군사적 고려가 없었습니다. 군사장비를 구매하는 데에는 통상 5-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군은 지뢰제거 장비를 긴급 수배-구매하여 많은 예산을 낭비했습니다. 그나마 사용가능한 지뢰를 북한에 내준다는 것은 북한에 퍼주는데 얼마나 경도돼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이에 대해 군사평론가인 나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한나라당에 연락하여 2000.9.4. 지뢰제거의 위험성을 알리는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신동아가 이를 아래와 같이 심층 보도했습니다,  

먼저 지뢰를 제거하면 북한이 쳐들어 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 아니냐는 논쟁부터 살펴보자. ‘경의선 복원을 위한 지뢰 제거는 인민군의 남침 통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지난 9월 4일 지만원 박사(池萬元·육사 22기)가 한나라당 의원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서 거론하면서 표면화 됐다. 지박사는 6공과 문민정부 시절 군사 비리를 맹공격한 인물.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쪽에서는 그의 의견을 경청해 정부를 비판한 적이 많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지박사의 연설은 지뢰 제거에 부담을 갖고 있는 군부의 속내를 대변한 측면도 있어, 곧 바로 주목을 받았다(지박사 발표문은 그의 홈페이지 www.systemclub.co.kr로 들어가면 읽어볼 수가 있다).  

“대통령까지도 의심해야”  

육군 대령 출신인 지박사는 “개성-문산 축선에는 지뢰·대(對)전차 장애물·영구진지·대규모 병력이 밀집돼 있어 유사시 남침하는 인민군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철로와 도로를 뚫어주면 지금까지 투자한 모든 방어시설이 의미를 잃게 된다. 서울은 불과 5시간 이내에 점령되고 5만 여명으로 추산되는 미국인과 일본인이 인질로 잡힐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5만 자국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북한과 전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인가? 전선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군은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포위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의선 복구를 땅굴과 비교해 이렇게 설명했다. 1조원을 맴도는 예산이 들어가고 수백 명의 병사가 희생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하다는 것인가? 이는 성주가 적장에게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주고, 길을 닦아주고,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라고 생각한다.  

6·25 전사를 다시 읽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당시(6·25 개전 초기) 국방부는 김일성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데도 국방부는 승전보만 방송했다. 그러다 포성이 가까워지자 놀란 서울 시민들이 한강으로 달려 나왔다. 이러한 시민들에게 국군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강 다리를 폭파해 다리 위에 있던 수천 명의 시민을 희생시켰다. 9만8,000여 명이던 당시 한국군 중에서 불과 2만2,000여 명만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한강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역사의 미스터리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때를 연상케 한다. 연설 결론부에서 지박사는 “안보는 단 1%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주제다.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까지도 의심해야 한다”라고 못박았다. (증45, 1쪽 하단-2쪽 중간)  

2002.11.13. UN사는 문제를 제기했고, 지뢰제거작업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증46, 5쪽) 

11. 1999년 연평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해군지휘관 왕따 전역

1999.6.15. 제1연평해전이 발생했고, 우리 해군은 완승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사기가 올라갔지만, 김대중은 달랐습니다. 대승을 이끈 당시 제2함대 사령관 박정성 사령관은 훈장을 받지 못했고, 그 대신에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좌천되었습니다.(증47)  

2006.6.19. 당시 2함대 사령관은 기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총 맞을 시간 기다렸다” “선제공격 중지는 군인 손발 묶어 놓는 것”(증48, 상단 제목부분)  

“두두두 ... 파파팍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서해상 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함정에서 우리 고속정을 향해 선제사격이 시작됐다. ‘절대 먼저 사격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침으로 포위 기동과 함미충돌전술만 싸웠던 우리 해군은 곧바로 자위권 차원의 반격을 시작했다.”(증48, 1쪽 하단). 그 결과가 좌천 후 예편인 것이었습니다.  

12. 2002년 제2의 연평해전에서 우리가 당한 것은 김대중이 해군의 손발 묶었기 때문

아래 교전규칙을 만든 관련자들을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6.29에서 참패한 것은 김대중이 지휘관의 소관사항인 야전작전권을 박탈한 데서 기인했습니다. 김대중은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 “쏘려면 청와대에 보고부터 하라”는 기막힌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더해 군수뇌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정됐던 아래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 교전규칙을 뒤엎은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규칙은 북한 선박으로부터 소총 유효사거리인 450m-500m 떨어진 곳에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됩니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은 아예 얼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규칙은 200m에서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예 맞아 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규칙은 200∼500m 사이의 공간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처분만 바라라는 명령입니다.  

6.29 당시, 바로 이 제3번째 교전수칙을 수행하다가 우리 해군은 비참하게 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교전규칙은 처음부터 맞아 죽으라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2002.6.30일자 조선일보 3면에 이런 기가가 있습니다.  

“북 경비정이 갑자기 85mm 함포로 불을 뿜었다. 고속정 2척에 타고 있던 장병들은 즉각 총원 전투배치 상태로 돌입했다. 모든 장병들이 화해와 평화만 믿고 전투배치조차 하지 않은 채 접근했던 것이다. 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들은 우리 장병을 속이기 위해 6.27일과 28일에도 왔다가 포구를 우리 경비정에 조준하고는 씨익 웃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29일에도 포구를 경비정에 조준했다. 장병들은 이번에도 의례히 씨익 웃고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이런 속임수로 저들은 일방적으로 테러를 가한 것이다.” 

2002.6.29. 연평해전에서 ‘선제사격금지’ 명령을 받은 참수리호는 북한의 낡은 함정으로부터 사격을 일방적으로 당해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는 국민 공지의 사실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들을 싸늘하게 무시한 채 빨간 넥타이를 매고 그 다음 날인 6.30.에 우리나라도 아닌 브라질-독일간의 결승전 경기를 본다며 일본으로 출국하여 경기를 관람했습니다.(증49)

▲ ⓒ뉴스타운

13. 해군 장병들을 북한의 함포에 맞게 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전사자들 적대시

1) 피 끓는 업코리아 기사 

그의 옆에는 일본왕이 있었습니다. 그 일본 왕이 이런 대통령을 보고 속으로 무어라 했겠습니까? 창피합니다. 2002.7.2. 삼성동 코엑스와 광화문에서 “월드컵성공개최대축제”가 열렸고, 김대중은 선수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증50). 2주년이 지난 2004.6.28. 네이버뉴스 업코리아 기사(증51)는 “김대중은 대한민국 편이 아니었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실었습니다.  

서해교전 나자 일본출국, 시민들 “이럴 수가” 충격, “한국 주둔 美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2003년 7월 10일자 한 주간지에 실린 故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는 육필수기는 김대중정권의 조국에 대한 배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2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체육관. 6월 29일 서해상에서 북한의 계획된 도발로 사망한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등 장병 4명의 합동영결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들과 전두환 前대통령, 손학규 경기지사, 장정길 해군 참모총장 등 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국가 최고지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뿐만 아니라 김동신 국방장관을 비롯, 국무위원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6월 29일 서해교전으로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슬픔에 잠겨 오열하고 있을 때 ‘한가하게’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30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한 것이다. 이날 출국때 공항에는 이한동 총리를 비롯, 김동신 국방,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부 관계자들이 나와 환송을 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이 서해 교전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본에 축구구경을 간다는 게 사실이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메아리 쳤다.  

7월 3일 대전 국립 현충원. 서해교전에서 산화한 4명의 전사자에 대한 삼우제(三虞祭 장사를 치른 뒤 세 번째 지내는 제사) 현장. 행사에는 유족 20여명과 해군본부 소속 장병 10여명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삼우제로서는 쓸쓸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곳에도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방장관이나 책임 있는 정부 고위관리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故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씨(당시 49세)는 “서쪽에서 아들이 죽었는데, 동쪽에서는 금강산 구경 간다고 하고…월드컵 잔치한다고 대통령이 나와 선수들한테 훈장을 주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절규하기도 했다.  

다시 서해교전이 있었던 6월 29일. 북한의 군사도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웃사랑회 관계자 39명, 한양대 관계자 4명,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정련 승려 등 5명, 사업가 1명 등 총 50명이 이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고려항공 편으로 방북했다고 통일부가 발표했다. 통일부는 또 서해도발 몇 시간 후 “꽃게잡이 철을 감안할 때 의도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공격을 가하는 등 무력 도발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 협정 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통일부 당국자는 또다시 “국방부측 설명은 북한군의 발포가 의도적이라고 하는 데, 전체적 측면으로는 의도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김대중정권이 누구 편이었던가를 묻게 한다. 과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애국심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놓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쪽체제와 역대 집권자에 대해서는 끝 모를 적의와 부정적 인식은 보여줬다. 반면에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상 유래 없는 폭압적 통치자인 김정일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강의 기적을 통해 보릿고개를 넘게 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지난 6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정일에 대해 “영리하고 솔직한 사람이며 한국과 세계 문제에 정통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 “김정일은 끈질긴 개혁가로 북한을 냉전시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반면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의 권위주의 정부가 경제성장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것은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 불균형한 성장이었다”고 혹평했다.  

일반 개인의 평범한 죽음과 전장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산화한 목숨은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고, 영해를 지키던 국군이 자그마치 4명(최종 6명)이나 전사했는데, 영결식장에 일국의 대통령이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 국민들의 정서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조국을 배반한 행태는 당시 정부 인사들에게 똑같이 전이(轉移)됐는지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각료들 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슬픔을 표시하지도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을 주적(主敵)이라고 부르는 것도 교묘하게 반대하고 방해했다. 80년대 친북노선을 추종했던 운동권출신들이 대거 김대중정권에 참여한 것은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이들이 북한의 지침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것은 당시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북한과 북한의 입장을 대변했던 재야단체들에 대해 무제한의 관용을 보여준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수적 시민단체들은 결국 김대중 정권 5년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가치관, 정통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고 주장해 왔다.(증51) 

2) 이명박 정권의 김대중의 역적행위 비난

이 글은 모두 사실이며, 사실을 드라이하게 나열했는데도 피가 거꾸로 솟게 합니다. 이런 자를 대통령이기는커녕 어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 할 것입니까? 역적이요, 반역자입니다. 효종 시절의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김자점은 능지처참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김대중은 이 대목에서 능지처참 이상의 형고를 받아야 할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6.29. 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이 김대중의 태도를 비판했습니다.(증52, 53)

“연평해전 때 김대중 정부, 김정일 보호에 급급”
“DJ, 조문 외면에 전사자 영결식 축소돼”

윤 대변인은 이날 현안 관련 브리핑에서 “오늘은 故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대한민국 영웅들을 떠나보낸 지 7년째로 제2연평해전 영웅들의 공훈과 숭고한 뜻을 높이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6.29 서해무력도발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계획적인 군사도발’이었다”라며 “그러나 당시 김대중(DJ) 정부는 북한의 침략행위를 축소하고, 김정일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했으며 ‘김정일은 개입되지 않았다’는 설이 유포 됐다. 당시 누가 그런 여론공작을 지시했고, 어떻게 이행됐는지 지금이라도 분명히 밝혀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조문을 외면했고, 전사자 영결식은 축소됐으며, 희생자들은 잊혀진 영웅이 돼 버렸다. 더욱이 사실과 다른 ‘우리 어선 책임론’까지 등장해 북한의 침략행위 사실을 왜곡하고, 군의 명예와 사기를 무너뜨렸다”라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서해교전’으로 불렸다. 그러다 지난해(주: 2008) 4월 ‘제2연평해전’으로, 추모식도 정부기념 행사로 승격됐다.(증52) 

서해교전 전사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2004.24.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군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계속된다면 누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서겠습니까?” (증54. 하단) 

3) 박동혁의 군의관 눈에 비친 김대중은 악질 간첩!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때 박동혁 병장은 의무병이었습니다. 총포탄이 작열하는 갑판에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부상 장병들을 돌보던 박동혁은 80일 동안 군의관 이 0 기(43, 현재 00대 심장내과 교수)로부터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만, 100 여개의 파편상과 극심한 화상을 이기지 못해 결국 숨졌습니다. 2012.6.26. 조선일보에는 당시 군의관이었던 이 0 기 의대 교수의 심정이 소개돼 있었습니다.  

이 0 기 군의관의 격정

“당시 전사 장병과 유가족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도 털끝 하나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는 군인들을 보면 ‘군바리’라고 불렀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했을 때 ‘드디어 군바리가 가고 민주정치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제2연평해전 부상자 돌보면서, 희생이 뭔지 배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군인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정부 관계자가 ‘우리 선박이 작전 통제선을 넘어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고,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지난 정권 떠올리면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진다. 당시 죽어간 사람들, 다친 이들이 생각나서…. 나 말고도 그 자리에 있던 군의관 모두 그랬다.”  

“지금 종북(從北) 국회의원을 보면 내 세금이 왜 이런 사람들 위해 쓰여야 하나 싶다. 이건 보수·진보 문제가 아니다. 나라 생명이 걸린 문제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건 나라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종북 인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 대한 모독을 자주 하더라.”  

“우리끼리 일 끝나고 맥주 한잔씩 할 때마다 제2연평해전 이야기를 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느냐고. 나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 죽어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 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나. 나 같아도 나서서 안 하겠다.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다. 당시 부상장병을 돌봤던 군의관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했었다.”  

“효순·미선양 사건(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우리 여중생 2명이 숨진 사건) 당시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서운하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하지만 나라 지키다 전사한 장병이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들의 죽음보다 과연 못한가,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나, 그렇게 값어치가 없나 싶더라. 효순·미선양 때 들었던 촛불, 우리 목숨 지키려다 희생한 젊은이들 위해서 들어줬나. 당시 촛불 든 사람들에게 정말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 촛불 다른 곳에서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좋은 뜻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홀대받은 장병 생각나서, 지금도 축구·촛불…. 보기 싫다.”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 조문 못하게 막았다. 유족들과 몇몇 군 관계자들만 왔다 갔다. 그건 진짜 아니다.”  

“유가족들에게 더 나은 혜택들을 보장해준다면 나도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몸을 던질 것 같다. 제2연평해전도 그렇게 명예를 드높여 줬다면, 자존감을 높여줬다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이 한을 풀지 못하고, 국가 상대로 소송 걸고 그럴까? 당시 정부는 대단히 잘못한 거다. 응당 해줘야 할 것을 안 해준 것이다. 유가족이 홀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북한이, 간첩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이 나라 젊은이들이 조금씩 그런 생각 먹게 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안보가 무너지게 하고, 분열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최전선에서 희생하고, 지키고 있으니까 우리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안보 아닌가.”  

위 글에 나타나 있는 김대중의 간첩 질

“나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 죽어 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 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나.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 조문 못하게 막았다. 당시 전사 장병과 유가족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북한이 원하는 것, 간첩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이 나라 젊은이들이 조금씩 그런 생각 먹게 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안보가 무너지게 되는 거다.”  

1. 김대중은 북괴군과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한 대한민국 장병들을 적대시했다.  

2. 김대중은 국민들에 ‘국가를 위해 다치고 죽으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애국심과 전의를 실종케 했다. 북과 간첩이 바라는 행위를 김대중이 직접 한 것이다. 김대중은 고정간첩(탈북상좌 김유송의 증언)이요 ‘김일성의 전사’(전 통전부 간부 장혜영의 증언)인 것이다.  

3. 1980년 김대중은 박정희가 사라진 무주공산을 집어 삼키려고 북악파크를 아지트 삼아 내란모의를 했고, 혁명이 성공했을 때를 대비한 내각명단까지 작성해 놓은 후 5월 16일 일개 야인 정치꾼으로 감히도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알았다. 김일성이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600명이 이미 게릴라전쟁을 수행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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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2016-10-19 00:06:53
이정도면 병이다 병 ^^ 틀니딱딱충들 부들부들하노 이기 ㅋㅋㅋㅋㅋㅋㅋ 씨@발거 꿀잼이다 이기야^^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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