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이루어진 5.18 광주폭동 사건 재조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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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에 이루어진 5.18 광주폭동 사건 재조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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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다

국가가 5.18 역사 탐구 노력에 가한 탄압-학대사

▲ 5.18 광주폭동 북한특수군 증거 사진을 제시하며 기자회견하는 지만원 박사 ⓒ뉴스타운

국가가 진실을 탐구하는 나에게 가한 탄압과 학대의 역사는 5.18 폭동사건의 본질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령과 중령 때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위치한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시스템분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이전한 경우는 미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처음 있는 경우였고, 박사 논문에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실은 것도 학교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 국방연구원에서 8년 동안 국방문제를 연구하다가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했다. 1990년 귀국하여 군사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썼고, 기고, 방송출연, 강연 등으로 10년 동안 수입 좋은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런 나의 행복했던 인생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 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북한에 국부를 퍼주는 행위에 대해 나는 가장 먼저 나섰고, 가장 앞장서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KCIA 부장인 임동원을 시켜 나를 도청케 했다. 2005년, KCIA의 도청사건이 사회 이슈화 되면서 무제한으로 도청을 주도한 KCIA 수장인 임동원이 감옥에 갔다. 임동원은 KCIA의 차장인 김은성과 통신정보국장에게 직접 지시하여 매일 나를 도청하고 감시케 했다. 김은성 차장은 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 같이 지만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임동원으로부터 추궁 당했고, 그런 일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이었다고 검찰조서에 진술했다. 임동원의 이런 행위로 인해 대기업들과 예약돼 있던 수십 개의 강의들이 순식에 날아 갔고, 방송, 기고가 일순간에 중지됐다. 이러한 손해와 불법 감시로 인한 고통은 일순간 공황으로 엄습했다. 2006년 나는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한국 재판부는 겨우 2,000만원만 배상하라 판결했다.  

2002년 8월, 나는 김대중이 김정일의 총독처럼 행동 한다는 3,500자의 칼럼 형 광고를 냈다. 김대중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요동쳤다. 5.18 유공자단체들이 광고문 중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됐다"는 45자의 문구가 "신성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두 가지 폭력을 가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어깨 12명을 서울로 데려와 내 사무실을 부수고 아파트 대문과 자동차를 파괴했다. 경찰은 바라 보기만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웃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가족들은 경찰의 사전 제보로 피난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광주 검찰청 최성필 검사가 경찰 4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서울 근교 나의 집으로 보내 6시간 거리인 광주로 압송하였다. 수도권 국민을 광주로 잡아가는 것은 형사소송법 제4조 '토지관할 규정'에 어긋 났지만, 김대중 정권 당시의 광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점령군 사령부로 행세했다. 아들 벌되는 4명의 경찰은 나의 팔을 뒤로 젖힌 채 수갑을 뒤로 채우고 이동하는 6시간 동안 모욕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린치를 가했고, 언어폭력을 가했다. 검찰청에 도착해서도 최성필 검사가 또 다른 2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우고 곧 때릴 듯한 제스처를 쓰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이웃 여성 검사가 나타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판사들이 고함을 지르고 탁자를 치며 노려 보았다. 공포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101일 동안 나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후 누구든 5.18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지만원처럼 당한다는 정서가 한국 사회에 팽배했다. 5.18은 광주가 지키는 성역이었고, 한국 좌익세력의 성지였다. 2002년부터 2008년 초까지 나는 5.18 사건에 대해 재판한 1996-97년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쪽을 모두 분석하여 1,720쪽 분량의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4권의 시리즈로 발행했다. 여기에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독특한 특수전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머리말을 인터넷에 올리자 즉각 5.18 단체들이 또 고소를 했다. 5.18의 숭고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5년 동안 재판을 받았다. 나는 판사로부터 "피고인은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다"는 예비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총 25회의 공판을 치렀다. 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5.18에 대한 책 3권을 더 발행했다.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확실하게 왔다는 결론을 낸 책들이다.  

똑같은 "북한특수군 개입" 표현으로 인해, 나는 2002년과 2008-1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2002년 재판에서는 광주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2008-2012년 재판에는 수도권인 안양과 서울에서 1,2,3심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로 판결됐다. 이는 5.18 세력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변으로 인식됐다. 수도권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광주 5.18 단체들이 70명씩 법정에 나타나 폭행을 했다. 방청하러 와 창밖을 내다 보고 있는 40대 여성을 뒤로부터 공격하여 귀가 찢어져 얼굴과 바닥에 피가 흘렀고, 귀걸이가 분실됐다. 손톱을 세우고 나의 얼굴을 긁어 놓겠다며 덤비기도 했다.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워 3차례의 휴정을 유발시켜 결국 재판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 벌되는 노인들을 향해 일당 얼마씩 받고 왔느냐, 느그들이 5.18에 대해 뭘 안다냐 등 반말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치기도 했다. 이렇듯 광주의 5.18 유공자단체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사회처럼 문명사회를 등지고 있다.  

2012년 12월 27일은 5.18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날이었다.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하고 갔다"는 금기의 표현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날이기 때문이다. 2개의 TV 방송국들이 2013년 1월부터 나를 여러 차례 초대하여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증거를 물었다. 이 출연 사실은 '5.18 분석 최종보고서' 209-210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행자들이 모두 나의 결론에 공감을 표했다.  

그 후 5월까지 많은 탈북자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는 증언들을 했다. 이중 가장 괄목할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5.18 광주에 실제로 참전했던 사람이 탈북하여 현재 서울근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TV에 출연한 사진이 위 저서 100쪽에 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됐던 침투조직 도표가 99쪽에 있다. 둘째,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소개 됐다. 위 책의 89쪽에는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이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내용을 폭로하는 사진이 있다. "5.18은 북한이 저질러 놓고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사태 직후 대남공작부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나의 연구결과가 사회일각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광주사람들이 좌익 정치인들과 정부 당국자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내가 출연했던 2개 방송국들을 공격하고 보훈처와 전두환의 사저 앞에서 폭력시위를 했다. 건물벽에 토마토와 계란을 투척하고, 쇠뭉치로 유리벽을 타격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들에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이 장면은 위 보고서 214-227쪽 사진들에 나타나 있다. 2013년 5월이었다.  

이에서 당시 국방장관 김관진(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국방부의 판단" 이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을 토스 받은 정홍원 국무총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총리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했다.  

2013년 6월 10일,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민주주의 근간을 허무는 망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사람들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삭제 등의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통령 직속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나서서 국무총리의 발언에 상응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5.18에 대한 방송을 중지시키고, 2개 방송국 진행자들에게 감봉을 포함한 중징계를 내렸다. 방송진행자들에게 사과방송을 강요했고, 방송 출연자들에게는 영구적인 방송출연금지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게 하는 이변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다.  

5.18에 대한 나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방송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방송통신심의원원회는 이어서 인터넷 공간까지 차단했다. 2013년 5월 7일, 유튜브에 게시한 동영상(제목 :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 왔다")을 2014년 7월 10일에 나에게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슬쩍 한국측 접속을 차단시켰다. 이어서 2014년 10월 23일,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5.18 연구결과물 28개를 무단 삭제한 후 수십 개의 글을 삭제하였다. 

2014년 11월, 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런 불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가 학문의 결과를 검열(Censorship)하고 차단하고 삭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5년 6월 12일,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는 5.18에 관한 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 내용 이외의 그 어떤 연구결과나 증거도 허용되지 않으며, 소수의견은 다수의 의견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단 돼야 한다는 요지의 실로 전근대적인 판결을 내렸다.  

"5.18에 대해 1997년의 사법적 판단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도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실로 충격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판결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진 찍힌 폭도 3명의 얼굴과 2010년 5월 17일, 북한 평양에서 거행된 제30회 5.18 기념행사장의 로얄박스에 앉아있는 3명의 얼굴이 일치 한다는 사진 분석 자료를 제출한 이후에 내려졌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60세-72세에 이르는 황금기의 인생 12년을 진실탐구에 전념했다. 이 진실탐구는 대한민국을, 악령과도 같은 5.18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격려 받아야 할 이런 노력을 단지 대한민국에서 했기 때문에 나는 지난 12년간의 인생황금기를 국가에 차압 당했던 것이다. 이상의 탄압에 더해 나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확산하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를 여러 개 얻었다. "지만원은 미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지만원은 말이 안 통하는 극우 극단주의자다", "지만원은 친일파다"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이 말들에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 생활을 하는 내 가족들이다.(끝)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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