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패망원인과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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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패망원인과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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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윤의 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리이다]

▲ 베트남(월남전)전쟁의 비극 적인 한장면. 자료사진

I.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근대 이전의 역사적 유사점

베트남에서는 약 30만 년 전 선사시대부터 인간 거주 흔적이 발견 되었고, 기원전 4천년부터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2천 년 전에는 철기문화가 시작하였다. 특히, 기원전 2천 년 전 부터 농경국가인 반랑국이 형성되었다. 반랑국의 흥왕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실제 7세기의 동선문화(Dong Son culture)의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면서 청동기 기술이 절정에 달한 반랑국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도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이전에 독자적인 토착문화를 이루어 왔다.

기원전 275년에 안 즈엉 브엉이 반랑국을 멸망시키고 어우락 왕국을 세웠다. 어우락 왕국은 진나라의 장수인 찌에우 다에 의해 합병되어 남비엣(南越)의 한부분이 된다. 찌에우 다는 중국인 관리에서 시작하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하고 자신을 현지인들과 동일시하면서 중국의 한나라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위대한 황제로 본다.

이 남비엣은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됨으로써 베트남은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한나라 이후에도 베트남의 중국 본토와의 대립은 계속 되어 촉의 제갈공명 같은 이에 의해서 복속 작업을 다시하게 되는 것을 중국 역사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 주는 내용이 그것이다.

당대(唐代)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점령하고 나서는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심지어 신라의 수도 경주에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 도독으로 임명하며 한반도를 식민지 삼으려 했듯이, 월남지역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월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당송교체기의 혼란기에 남비엣(南越)지역을 장악한 류엔이 국호를 처음에는 대월이라 하고 나중에는 남한으로 바꾸었다. 이 세력은 베트남 내의 중국 안남 도호부와는 별도의 세력을 이루면서 베트남지역을 장악하였지만, 베트남에서의 중국세력을 몰아내려는 또 다른 세력인 응오꾸엔(吳權)과의 일전을 벌인다. 결국 남한은 망했고, 이 응오꾸엔은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두었다.

응오꾸엔이 이듬해인 939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를 세운다. 이후 딩왕조로 이어졌고 그다음 왕조는 레왕조로 이 레(黎)왕조는 송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지켰다. 그리고 1009년 안남에 왕조를 설립한 리꽁우언에 의해 리(李)왕조는 창건되어 송나라의 재 침입을 물리치면서 200년간 왕조를 이어간 강력한 왕조였다.

13세기에 원나라의 침입과 쩐두도 장군의 궁중 쿠데타로 리왕조는 무너졌고 쩐씨왕조를 세운다. 쩐씨 왕실 측의 리씨 전멸작전에 따라 왕족 리씨들은 멸족되었다. 그런데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왕국 리(Li)씨 왕조의 마지막 왕자 이용상 왕자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바다로 탈출, 필사의 항해 끝에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상륙한다.

고려 조정은 한자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용상 왕자와 필담을 나눈 끝에 그가 안남국 왕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화산君으로 봉하고 고려 여인과 결혼시켜 고려에 정착시켜 화산 이씨의 선조가 되었다. 화산 이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은 시조 용상의 6세 손 맹운이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한 후 국운이 기울자 해주 원통리에 은거하면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이태조가 세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화산 이씨는 1985년 현재 남한에 258가구, 1,3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 달성군에 집성촌을 이루어 모여 살고 있다.

리왕조는 외세를 물리침은 물론 많은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였기에 베트남에서는 우리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안남왕국에 대한 애틋한 국민들의 여망을 모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대도시 탕룽(昇龍)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안남왕국 건국일인 3월15일이면 제사를 드린다.

왕손 리씨를 제사장으로 세우려 했으나 베트남 안에서 왕손을 찾을 수 없어 탕룽 시장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대행토록 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 한국과 국교 수립을 앞두고 있던 베트남 정부는 13세기 초 멸족된 줄로만 알고 있던 옛 리씨 왕족의 후손들이 이역만리 한국에서 상당한 가문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리씨왕조의 후손이 이역만리 한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이들을 왕손으로 예우하고, 매년 화산 이씨 종친회장을 특별히 초청, 탕룽의 제주로써 제사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 화산 이씨의 종친회장이 호찌민시의 탄손넛 공항에 도착, 탕룽으로 이동, 종묘제사를 지내기까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TV에 방송했고, 그 광경을 시청한 베트남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튼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쩐흥다오에 의해 쩐(陳)왕조(1226~1400)가 세워져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의 하나로 군림하였다. 그 이후 쩐왕조의 멸망 이후 들어선 호왕조는 허약하여 명나라의 침입을 받으면서 1406년에는 다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약 20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1428년 레러이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허우)레왕조((後黎)왕조,1428 ~ 1788)는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 지배한 왕조의 하나이다. 특히 네번째 왕인 타인똥(聖宗)은 베트남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만들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당율을 근간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한 베트남 최고의 성문법인 ‘국조형률(國朝刑律)’을 만들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실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남방정벌에 나서 참파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까지 정복하였다.

타인똥의 사후에 혼란 속에 막당중에 의해 왕조가 멸망하였지만 다시 레왕조의 중흥노력이 일어나서 1592년 막씨가 축출되고 레왕조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왕조의 정통성과 권력을 둘러싸고 북쪽에는 찡 가(家)가, 남쪽에는 응웬 가(家)가 지배하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양쪽간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대립과 분열이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로 간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휴전을 하여 1세기 정도를 지냈으나, 오랜 전란으로 전국의 농촌이 황폐화되면서 농민들의 봉기가 빈발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1771년 응웬냑, 응웬후에, 응웬르 삼형제가 농민들을 모아 일으킨 떠이썬(西山) 봉기로 남부의 응웬가의 세력이 1774년 무너졌고, 북부의 찡가의 세력까지 무너졌다. 북부 레왕조의 구원요청으로 당도한 청나라의 20만 군대가 수도인 탕롱(오늘날의 하노이)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1788년 후에(Hue)에서 왕위에 올라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 에게 패배한다.

레왕조 시대의 남부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응웬가의 응웬아잉은 마침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떠이산 군을 물리치고 후에를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의 응웬왕조를 창건하게 되며, 이 왕조는 국호를 과거의 중국에서 불렀던 남비에트와 구분하여 비에트남(越南)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응웬왕조의 2대 황제 성조명명제(聖祖明命帝)가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구실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응웬왕조 자체는 1945년까지 유지 되었다.

II. 근대 베트남과 패망원인 그리고 근대 대한민국과 현재 상황의 유사점

프랑스 식민지화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 졌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 내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도차이나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ochina)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이 저항을 했는데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구성원이 결집되기는 하였으나,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이 중심되어 베트남 독립연맹인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하여,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명목의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8월 혁명’ 이라고 부른다.

이후 베트남은 ‘민족’ 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였고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에서 성공적인 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왕정을 폐지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 노동당의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중심인 베트민(Viet Minh)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비엣 남 전 쭈 꽁 호아)을 선포하였다. 1945년 호치민(베트남어: Hồ Chí Minh, 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민에 의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하노이를 수도로 하였다. 호치민은 맑스 사상을 공부한 공산주의자 이지만 동시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오랜 식민 지배에 지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전쟁 전의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는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발발하였다.

베트남전쟁은 ‘30년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1946~1956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프랑스 간에 일어난 1차 전쟁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 하며, 1960~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 간에 일어난 2차 전쟁을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 한다.

1946년 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무력 충돌에서 시작된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베트민의 승리로 끝나게 될 때까지 9년간 지속됐다.

1950년대부터 베트민(Viet Minh)은 중국으로부터,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민을 압도하지 못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실질적인 자신의 토지를 받은 농민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고, 그로 인해 병력을 동원하는 막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런 토지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전쟁참여와 게릴라전을 프랑스군은 감당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군사작전에서도 실패를 하였는데 라오스 국경 부근 디엔비엔푸에 집결하여, 이곳으로 베트민 군을 유인해 한 번에 괴멸시키려는 계획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한곳에 집결된 좋은 목표물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제네바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국제회담(제네바극동평화회의)이 성사됨에 따라 프랑스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전쟁이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세력의 확대를 희망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 최초의 공산 국가인 북베트남을 세우려 했지만 미국과의 전면적인 확전을 우려되어 소련과 중국이 일단 베트민(Viet Minh)에게 1956년에 실시될 베트남 남북총선 이전까지 위도 17도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분할 할 것을 요구했고, 베트민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결국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으로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고, 베트민은 북위 17 도선 (군사분계선, DMZ) 이북의 북베트남을 통치했다.

제네바회담에서 결정된 1956년의 통일 선거에서는 호치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뚜렷했기 때문에 미국은 그 선거의 실시를 막기 위해 힘썼다. 선거가 있기 전해인 1955년에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수립했고, 이 정권에 군사와 경제 원조를 하였다. 디엠정권은 제네바협정에서 합의된 베트남 남과 북의 1957년의 총선 실시 조항을 거부하였다.

디엠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으로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할당받은 농민들에게서 다시 토지를 회수하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억압하여서 국민적인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민중의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1958년 미국의 후원을 받아 반공법을 시행하여 남베트남 내 노동당 조직을 와해하는 군사적 공세를 하자 봉기가 일어났고, 급기야 1960년에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통칭 베트콩)이 결성되어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폈다.

당시 미국 민주당의 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강화하였지만, 미국의 고민은 디엠정권이 민주주의 국가와는 거리가 먼 독재정권이요, 부패가 만연하다는 점이었다. 1963년에 디엠은 쿠데타로 실각했으나, 그 후로도 정권의 부패는 계속되었고 사이공정부는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군의 정예부대조차도 쿠데타에 대비하여 사이공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베트콩과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전황도 악화되기만 하였다.

그들의 남베트남 정부 붕괴를 위한 봉기의 시작은 ‘지금의 대한민국(남한) 내 종북 좌파 세력인 통진당 등 야당과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정권에 대항하고, 베트남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노동당 조직이 축소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민국(남한)에서는 호남지방에서 주로 좌익 세력이 크듯이’ 남베트남에서는 메콩강 하류 델타지역에서 주로 자리를 잡고 봉기를 일으켜서 점차 확산되었고, ‘대한민국(남한)의 농민과 노동자 근로계층에 좌익 세력을 확장 시켰듯이’ 그들도 낮은 소득층과 근로 서민에 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했다. 어느 정도 세력이 생기자 ‘통진당 이석기의 RO가 생겨났듯이’, 1960년 12월 남베트남 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 : NLF) 즉, 베트콩이 결성되어 각지에서 디엠정권(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남한)에서도 예비역 장성들이 민주당 등에서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남베트남에서는 아예 성장(城將 : 지자체장)으로 베트콩을 양성 한 일도 있을 정도로 남베트남은 혼란했고 그들을 축출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우리나라 지역 사회 즉 호남권과 수도권 지자체장이나 교육감 같은 경우 전혀 손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남베트남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팜 녹 타오 대령은 북베트남(월맹)의 전신인 베트민 대대장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남베트남에 남아 월남 육군 대령으로 근무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가톨릭(천주교) 신자여서 당시 베트남 대통령 디엠과 친분이 있어 1959년 빈트리성의 성장으로 임명 되었는데, 그러자 베트콩 조직을 빈트리성에 집결 시키고 고사 위기의 베트콩 조직을 재정비하여 디엠정권을 없애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여 해병대와 공수부대를 쿠데타 시키고, 그 후 티우 대통령에게 쫓겨 다니다가 가톨릭(천주교) 신부와 수녀들이 그를 숨겨 주어서 다시 쿠데타 준비하다 남베트남 정보국에 은신처를 들켜 총격을 받았다. 어쩌면 요즈음 대한민국(남한)내 종북 좌파 세력들 행동과 똑 같은가!

이 때 까지 북베트남(월맹)에서는 본격 개입하지 않았다. 남베트남에서의 혼란을 본 미국은 1961년 캐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간주했다.

2013년 지금 대한민국(남한)내 종북 좌파 가톨릭(천주교) 신부와 불교 승들과 마찬가지로, 1963년 사이공에서도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발생했다. 물론 대한민국(남한)에서 종교인 행세하는 종북 좌파 종교인들은 이들과 달라서 전혀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만큼의 양심적이고 정직한 위인들이 아닌 거짓된 인물들이다.

정국의 혼란 속에 1963년 11월 즈엉반민(Dưong Van Minh)의 군사 쿠데타로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고 디엠정권은 붕괴되었다. 또 1964년 응우옌구엔 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였다.

남베트남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고, 과거 대한민국(남한)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과 같이, 새로 집권한 정권이 베트콩(NLF : 남베트남 민족자유전선)에 대해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고, 미국은 남베트남의 공산혁명세력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도미노 현상을 우려하였다.

남베트남 공산혁명세력의 공세가 점점 강해져 남베트남의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미국은 베트남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게릴라에 대한 지원통로로 활용했던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공격하는 한편, 1964년 8월에 미국 구축함이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을 받은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 2월부터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에 나서면서 미국이 전면적으로 참전하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을 공산화에서 구하기 위해 케네디에 이은 미국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은 미국 지상군의 베트남 참전을 강화하여 결국 50만 명의 대군이 투입되었다. 이에 질세라 베트남 공화국 안의 게릴라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67년 11월까지 미국은 55만 3천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였다. 그 중 5만 8천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 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여 전투력을 상실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히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이 평화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피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더욱 증강 시키는 심리작전에 이제는 남베트남 국민 이외의 외부적 작용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전쟁에 대한 혐오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남한)도 1964년 9월 11일 대한민국은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 이동외과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였으며, 1965년 3월 10일 공병대가 중심이 된 비둘기부대가 파월되었다. 1965년 10월 맹호부대와 해군 청룡부대가 파견되었으며 1966년 백마부대 등 약 30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쟁에 파견하였다. 전투 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은 약 5,000명이 전사하였고 1만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군사 및 경제개발과 관련한 조치였으며,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그 외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도 파병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남베트남 군인은 25만 명 이상 사망했고, 베트콩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백만 명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1968년 1월 31일 남베트남 민족자유전선(NLF) 즉, 베트콩은 새해 테트(Tet : 구정) 축제를 기점으로 사이공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미국의 주요시설을 공격하는 구정 공세 작전을 대규모로 감행했다.

이 공격에서 결사대가 한때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일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존슨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불출마 선언과 동시에 폭격을 정지시키겠다고 하며 평화회담 개최를 제안하며, 1968년부터 파리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968년 남베트남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어 전쟁이 패배할 것이라는 심리적 위축감이 팽배하게 되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멀랜드(William C. Westmoreland)는 미군의 추가 파병을 요구하였지만 여력이 없는 미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이후 반전 여론이 높아 미국에서는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1968년 11월에 있은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군사적 개입 중단을 내세운 닉슨(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 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주장하면서 베트남 문화 정책을 추진하여 미국군의 역할을 점차 베트남 공화국에 떠넘기면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17도 이남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베트남과 대치 국면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 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며 전쟁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1970년 초부터 전황은 캄보디아(1970), 라오스(1971)로 확대되었고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 까지 시작 되었으며, 미국은 B-52폭격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지만 1971년에는 베트남의 미군이 15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1972년 여름이 되어서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본격적인 평화교섭이 다시 재개되었고,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였다.

1) 미국은 미군 전쟁 포로들을 석방해 줄 것을 북베트남에 요구했다.

2) 그사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감축은 꾸준히 진행되어 한때 54만 명에 이르던 미군은 33만 명으로 줄었고,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성립된 후, 정전이 이루어져 미군의 철수가 결정되었다.

3)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닉슨 체제의 정통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에 따라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4) 남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 민족자유전선(NLF : 베트콩)이 민족화해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 휴전협정의 합의는 또 다른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왔다.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남한)에서 종북 좌파 세력들과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 고려 연방제식 통일, 민족화해위원 등 모든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끔찍하게 꼭 닮았는지 모르겠다. 당시 남베트남의 제일 야당 당수가 북베트남(월맹)의 스파이라는 것도 어쩌면 우리도 한번 비교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런데 그들도 적화 후에 모두 처형을 당했다. 문란한 정권에는 늘 그런 자들이 끼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미군의 지지를 잃게 된 남베트남은 지원받은 무기는 군부가 돈을 받고 북베트남(월맹)에 팔아치워서 조만간에 북베트남으로가 있을 정도이고, 남베트남의 수도가 함락 당하기 직전에도 권력 잡으려고 쿠테타가 일어날 정도였기에 국민들은 부정부패에 신물이 나고 가혹한 수탈 때문에 오히려 북베트남(월맹) 군을 환영했을 정도였다.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을 공격했을 당시도, 지금의 대한민국(남한) 가톨릭(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와 같이, 남베트남 가톨릭(천주교) 짠후탄(Tran Huu Thanh) 신부는 북베트남(월맹) 공산군의 공격을 반독재 민중공세라고 하며, 남침을 저지하던 당시 남베트남 티우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남베트남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이 계속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1975년 구정 무렵 북베트남(월맹)이 총 공세를 벌였고, 그러는 와중에도 남베트남의 비열한 정부 관료와 여당 대표 인사들은, ‘지금의 대한민국(남한)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정체성이 의심 가는 일부 국회의원들 같이’, 북베트남(월맹)의 공세에 대항하지 말고 평화롭게 협상하자고 주장하는 적과 내통한 반역자들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결국 반역자들도 적화(공산화) 된 후 ‘최근 잔인하게 총살된 북한의 장성택 같이’ 모두 다 노동 교화와 구금으로 고통 속에서 죽었다.

그해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고 두엉반민(Duong Van Minh) 대통령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공식적으로 다음해인 1976년에 실시된 통일 선거로 베트남 사회주의 민주공화국으로 합병 되고, 지구상에서 자유 남베트남은 영원히 사라졌다.

글 : 손상윤의 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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