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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 홍정전(弘政殿),광정전(光政殿),흠명전(欽明殿),누대(樓臺),금천교(禁川橋) 원형 복원해야
 김민수_
 2013-07-15 13:53:13  |   조회: 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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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 홍정전(弘政殿),광정전(光政殿),흠명전(欽明殿),누대(樓臺),금천교(禁川橋) 원형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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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朝鮮國:1393-1897)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킨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1617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여 인왕산(仁王山) 아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체부동,누하동,누상동 지역에 궁궐을 창건하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는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대 국왕 인조(仁祖)의 아버지 추존 국왕 원종(元宗)의 사저 북쪽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1618년 4월 4일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전교하였다.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을 장차 청와(靑瓦)로 덮고 근정전(勤政殿)의 예에 따라 단청에 쓰는 진한 채색으로 칠하려 하니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외방에서 올려 보낸 은자(銀子)를 이번에 부경(赴京)하는 세 차례 사신 행차에 따라가는 화원(畫員)들에게 똑같이 나눠주어 채색(彩色)을 골라 무역해 오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4월 9일 전교하였다.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정문(正門)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중층문(重層門)으로 조성하고 경덕궁(慶德宮)은 그저 잠시 피해 거처하는 피우처(避寓處)일 뿐이니 단층문(單層門)으로 알아서 조성하도록 하라. 그리고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곧바로 급히 처치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결정하지 않았는가.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4월 28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 “황와(黃瓦)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석자황(石雌黃)을 창졸간에 많이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시기에 맞춰 구워내야만 장마가 닥치기 전에 홍(弘)·정(光) 등 양전(兩殿)의 지붕을 덮을 수가 있는데 여러 곳에서 무역해 얻는 숫자가 매우 약소한 데다 무역해 올 즈음에 걸핏하면 열흘이나 한 달을 넘기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잡물소(雜物所)와 채색소(彩色所)에서 입수하여 구비해 놓은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용도가 급하지 않다 하니 10여 근(斤)을 우선 가져다 쓰고서 선득리(宣得李)가 무역해 오면 빌린 만큼 상환(償還)토록 했으면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윤4월 16일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아뢰기를, “전교하시기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에 금천교(禁川橋)를 들일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各司)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서계(書啓)하고, 금천교를 들이지 않을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일일이 그림으로 작성해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녹계(錄啓)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금천교를 궐내에 들일 경우에는 당연히 물려서 쌓아야 하는데 그때 담 내외로 철거해야 할 인가는 모두 76호(戶)입니다. 그리고 궐내로 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별로 물려서 쌓을 일은 없고 단지 어로(御路)만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할 집은 34호입니다. 상기 두 조목에 대해 모두 녹계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인경궁(仁慶宮)에 금천교(禁川橋)를 들여서 짓지 않는다면 보기에 형편없을 듯하니,승려 성지(性智)와 술사(術師) 시문용(施文用)에게 자세히 물어보고서 좋은 쪽으로 선처하도록 하라.”하였다. 6월 19일 인시(寅時) 초에 왕이 인경궁(仁慶宮)에 가서 공사의 진행 과정을 살피고 형세를 두루 훑어보면서 공사 일정을 독촉한 뒤 해가 지자 환궁하였다.













1620년 10월 18일 15대 국왕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비밀리에 전교하기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남쪽 행랑채에 무너진 곳이 많다는데 금군(禁軍)과 포수, 군사들을 배정하여 밤낮으로 떠나지 말고 지켜 단 일분도 허술함이 없도록 분병조(分兵曹)에 말하라. 만약에 조심하지 않는 일이 있을 때는 분병조 당상관은 파직시키고 낭청은 잡아들여 추고할 것이라고 거듭 타이르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남쪽 행랑채가 어제 무너졌다는데 오늘 내로 많은 군장(軍匠)을 동원하여 빨리빨리 담을 쌓도록 분병조(分兵曹)에 말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경운궁(慶運宮)의 수궁(守宮) 내관(內官)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승전색(承傳色) 내관(內官)은 당연히 기찰하고 단단히 지키도록 거듭 하교하여 강조한 것이 한두번이 아닌데도 전교를 무시한 채 제대로 지키지를 않았다. 심지어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남쪽 행랑이 다 무너져내렸는데도 이를 곧바로 아뢰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모두 죄를 지은 벼슬아치를 공무를 집행하게 하면서 심문(審問)하는 행공추고(行公推考)하도록 하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요즘 경운궁 기찰 등의 일이 갈수록 더 해이해져 놀랄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매우 한심한 일로 사헌부가 직무 수행을 너무 태만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헌부 성상소(城上所)를 패초(牌招)하여 날마다 나가 날로 새롭게 살피고 점검하도록 말해 보내라.”하였다.













1633년 7월 11일 인조가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여 광조실록(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수정하였다. 춘추관(春秋館)이 아뢰기를,“광조(광해군) 초년 이후로는 사필(史筆)이 이이첨(李爾瞻)의 문객에게서 나왔으므로 그 더럽고 어지러운 정치를 모두 사실대로 바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반정 초기에 사대부들 집에 소장된 일기 및 장소(章疏)·조보에서 주워 모으고 또 듣고 본 것에서 채취하여 찬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년 변란에 거의 반이나 유실되었고 뒤에 병화로 인하여 강도 사고(江都 史庫)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사관을 시켜 가져다가 사국(史局)을 설치해 수정하여 역사를 완성하게 하소서.”하니, 인조가 따랐다.8월 10일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국(局)을 열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수정하다가 국휼(國恤)을 만났고 이어 국경에 사변(事變)이 있어서 그 일기를 강도(江都)로 실어 보냈었는데, 지난번 포쇄(曝曬)하러 갔던 길에 이미 그 일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9월 2일 찬수청이 아뢰기를,“광해군일기 1백 86개월 동안의 사적을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찬수청을 설치하여 일기를 편찬하면서 일반 여염(閭閻)에서 조보(朝報)나 장주(章奏)를 수집하고 당시에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었던 사실을 참고하여 겨우 두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에 1백 32개월 분은 이미 중초(中草)를 만들었고 54개월 분은 난초(亂草) 상태로서 미처 베껴 쓰지 못하였는데, 또 호란(胡亂)을 만나 갑작스레 찬수청을 철수했었습니다. 그 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일기의 자료가 분실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미 계청(啓請)하여 찬수청을 설치해 지금 수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머지 않아 끝마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처음 생각에는 중초를 다 베끼기를 기다려 사국(史局)에 간직해 두었다가 사세를 보아 가면서 인쇄해 내려고 하였습니다. 논의한 자들이 대부분 ‘간신히 모아 놓았는데 초안만 잡아 놓으면 뜻밖에 재앙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찬수청을 설치한 이 기회에 기한을 정하여 인쇄해 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빠른 시일 내에 인쇄하여 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1622년 12월 3일 전교하기를,“인경궁(仁慶宮)의 못을 판 곳에 경회루(慶會樓)의 제도에 따라 조성하되 높이와 크기는 경회루처럼 할 필요 없이 간략하게 하나의 누대(樓臺)를 지어 조정 신하들을 접견하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무사들을 시험보이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담당 제조 박홍도가 내일 그곳에 가서 중사(中使) 및 성지(性智)와 상의하여 아뢰도록 할 것을 도감에 이르라.”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증살(蒸殺)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고 1618년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킨 광조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선왕들의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는 수성궁(壽聖宮),자수궁(慈壽宮) 남쪽에 창건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1616년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피우처(避寓處) 경희궁(慶熙宮)과 남북으로 이어서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창건되었으며 정전인 홍정전(弘政殿)과 편전 광정전(光政殿),내전 청와전,흠명전(欽明殿),화정당,중휘당(重暉堂)이 있었고 광조가 인경궁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단절되었던 청기와 굽는 기술을 되살렸다. 청와(靑瓦)는 조선시대에 궁궐에서도 정전이나 편전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고 현존하는 청와(靑瓦) 건물도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경복궁의 침전(寢殿),궁문(宮門),경회루(慶會樓)를 청와(靑瓦)로 이으려 하였고 창경궁의 인양전과 명정전 등을 청와(靑瓦)로 이으라는 하명(下命)도 있었다. 경복궁의 침전은 청와(靑瓦) 조각이 발굴된 바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15대 국왕 광조에 의한 궁궐 영건 당시 서궁 인경궁에 청와(靑瓦)건물이 3동 지어졌는데 인조 대에 훼철되면서 창덕궁 선정전,경훈각,창경궁 통명전으로 이건되었다. 광조 대에는 역관(譯官) 방의남(方義男)이 중국에서 황와(黃瓦), 청와(靑瓦) 제조법을 배워와 황와(黃瓦), 청와(靑瓦)가 제작, 궁궐건축에 사용되어 국왕의 귄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조형물로 여겨졌다. 궁궐 이외에 청와(靑瓦)가 사용된 곳은 조선 전기에는 원각사(圓覺寺),세검정(洗劍亭) 북쪽 사찰 장의사(藏義寺), 탕춘대(蕩春臺)와 같이 왕실 관련 불교사찰이나 국왕이 행차하던 명승지에 조선 후기에는 관왕묘(關王廟),영은문(迎恩門) 등에 청와(靑瓦)가 쓰였다.











청와(靑瓦)는 7대 국왕 세조,10대 국왕 연조,15대 국왕 광조 대에 생산되어 사찰과 궁전 건축에 사용되었으며 선정전(宣政殿)은 조선 국왕이 평소에 정사를 펴던 편전으로 조선시대 궁궐에서 유일하게 청와(靑瓦)가 남아 있는 건물이고 1830년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선정전 지붕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방대한 양의 불전(佛典)을 번역, 간행하고 원찰(願刹) 원각사(圓覺寺)를 건설하면서 법당 지붕용으로 8만 장이나 되는 방대한 량의 청와(靑瓦)를 생산케 했다. 청와(靑瓦) 제조 방법은 세종실록에 1438년 8월 15일 승지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근일 청와(靑瓦)를 구워 만들려고 선군(船軍)을 징발하였다 하옵는데, 신은 생각하옵기를, 근정전(勤政殿)은 이미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 되어 있으므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좋을 것이오나, 대내의 침전(寢殿) 등의 여러 궁전이야 기와를 고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청와는 노력과 비용이 적지 않게 들고 염초(焰硝)로 만드는 것이온데, 염초는 곧 군수(軍需) 물자이며 달이기도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기를, 이 역시 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하니, 임금은 묵연(默然)한 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실록에도 1468년 9월 11일 예종이 승정원에서 전지를 받들어 강원도 관찰사 김관(金瓘)에게 치서(馳書)하기를,“청와(靑瓦)에 쓰이는 금성현(金成縣)의 연철(鉛鐵)은 단지 채취한 것만 올리고 다시 캐지 못하게 하라.”하였다.라고 적었으며 연조실록에는 1506년 8월 3일 함경도 단천에서 바친 납 6,900근에서 은을 제련해 낸 연슬러그로 청와(靑瓦)를 만들게 했다’고 적었다.











청와(靑瓦)의 기본원료인 찰흙의 크기는 0.01밀리미터 이하의 점토질로 재료가 미세할수록 팽창성과 수축성이 적어지면서 균열이 적어진다. 청와(靑瓦)의 원료로 염초(焰硝)를 사용하는 것은 현대의 질산칼륨을 말하고 질산칼륨의 용융점(鎔融點)은 330도로 화합물의 용융점을 낮추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흡수성이 적어 녹여지는 화합물이 골고루 융합되게 함으로써 기와의 표면을 고르고 매끄럽게 만든다. 납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는 연슬러그(납 찌꺼기 덩어리)는 청와(靑瓦)의 푸른 색깔을 내는 원료이다. 납은 푸른색이 흰색과 조화된 유연한 금속으로 용융점(鎔融點)이 327〜400도에 불과하지만 알칼리와 철산화물 등이 들어있는 고령토(高嶺土)와 연슬러그(납 찌꺼기 덩어리)를 섞어 만든 유약으로 기와 표면에 발라 1,000-1,150도에서 소성(燒成)하면 청와(靑瓦)의 푸른색이 나타난다.조선국 16대 국왕 인조(仁祖)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경궁에 이건하였고 인경궁은 영조 대에 완전 철폐되었으며 1623년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인조는 인조 8년(1630) 인경궁(仁慶宮)에서 폐출(廢黜)된 영창대군의 어머니이며 조선국 14대 국왕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풍정(豊呈)의례를 거행하였고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에 의해 경운궁(慶運宮)애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으로 폐출(廢黜)된 인목대비(仁穆大妃)는 1632년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1645년 5월 3일 인조가 하교하였다.경희궁의 경현당(景賢堂)이 비좁으니 혼궁(魂宮)을 인경궁(仁慶宮)의 중휘당(重暉堂)에 설치하는 것이 옳다.”











인경궁(仁慶宮)의 누대(樓臺) 터의 누상동,누하동은 인경궁(仁慶宮) 누대(樓臺)길로,금천교(禁川橋) 터는 인경궁 금천교(禁川橋) 길로,통인동은 세종의 잠저(潛邸)인 장의동본궁(壯義洞本宮) 터이므로 장의동본궁(壯義洞本宮)길로, 선조(宣祖)의 잠저(潛邸) 도정궁(都正宮) 터는 도정궁(都正宮)길로,필운동은 인왕산(仁王山)의 별칭인 필운산(弼雲山),이항복(李恒福)의 옛 집터에 있는 필운대(弼雲臺)에서 유래하였으므로 필운대(弼雲臺)길로,사직동은 사직단(社稷壇)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사직단(社稷壇)길로, 체부동은 전시(戰時) 총사령관(總司令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군무(軍務)를 총괄한 체찰사부(體察使府:체부청(體府廳))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체부청(體府廳)길로,통의동은 영조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 터가 있으므로 창의궁(彰義宮)길로,궁중의 생선,고기,소금,땔나무,숯을 조달한 사재감(司宰監) 터는 사재감(司宰監)길로,인조(仁祖)의 잠저(潛邸) 어의궁(於義宮) 터는 어의궁(於義宮)길로,궁중에 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공급하는 내자시(內資寺) 터는 내자시(內資寺)길로,효자동은 선조 대의 학자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희철(希哲) 형제가 효자로 이름 나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旌門)이 있어 이 효곡(孝谷)이라고 했으므로 효곡(孝谷)길로,청운동은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청풍계 백운동(淸風溪 白雲洞)길로,신교동은 장조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의 신교(新橋)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선희궁 신교(新橋)길로,궁정동은 조선국 국왕을 생산한 후궁의 사당 사친묘(私親廟) 6궁(六宮)이 있으므로 6궁(六宮)길로, 자수궁(慈壽宮) 터는 자수궁(慈壽宮)길로,영수궁(寧壽宮) 터는 영수궁(寧壽宮)길로, 수성궁(壽城宮) 터는 수성궁(壽城宮)길로, 송석원(松石園) 터는 송석원(松石園)길로,인왕동은 인왕산, 인왕사(仁王寺)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인왕사(仁王寺)길로,옥류동천(玉流洞川)이 흐르는 지역은 옥류동천(玉流洞川)길로 도로명주소를 부여해야 한다.
2013-07-15 13: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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