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타라스 필렌코 박사 “음악은 우크라이나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는 결정적 힘”

우크라이나 독립 35주년 기념 연주회 '자유의 선율'... 연주자 타라스 필렌코 박사와의 인터뷰

2026-08-20     손윤희 기자
타라스

우크라이나 독립 3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음악회가 지난 19일 서울에서 열렸다.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우크라이나학과가 공동 주최한 이번 음악회는 ‘자유의 선율(Notes of Freedom)’을 주제로,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인 타라스 필렌코(Taras Filenko) 박사의 피아노 연주와 강연으로 진행됐다. 공연은 이날 오후 7시 30분 서울 강남구 아이러브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무대는 단순한 피아노 연주회를 넘어 우크라이나 음악이 걸어온 역사와 그 안에 담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함께 소개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날 프로그램은 후기 바로크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 음악의 흐름을 폭넓게 조명했다. 특히 음악 연주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설을 더함으로써, 한국 관객들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우크라이나 음악의 전통과 그 배경을 함께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타라스 필렌코 박사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다. 키이우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뒤 이곳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휘·성악학부 부학장을 역임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는 역사음악학과 민족음악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40년 넘게 음악사와 민족음악학 연구, 피아노·오르간 연주와 합창 지휘, 교육 활동을 아우르며 학문과 연주를 함께 이어왔다. 그의 음악 활동에서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는 우크라이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필렌코

특히 2022년 이후 필렌코 박사는 세계 각국에서 우크라이나의 음악과 문화를 알리는 공연과 강연, 마스터클래스 등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공연은 피아노 연주에 그치지 않고 음악에 대한 해설과 시각예술, 시와 역사적 이야기를 결합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현지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제공된 활동 자료에는 이러한 공연의 목적을 세계 관객에게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고, 장기적인 문화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렌코 박사는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인도, 멕시코, 아르메니아, 조지아, 콜롬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 공연과 강연을 진행해 왔으며, 2026년에도 우간다·케냐·모리셔스·보츠와나·콩고민주공화국·남아프리카공화국·모잠비크 등에서 공연과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35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서울 공연에서 필렌코 박사는 음악을 통해 한 나라의 역사와 기억,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지를 관객들과 나눴다.

공연에 앞서 필렌코 박사를 만나 우크라이나 음악이 가진 의미와 그가 세계 각국을 돌며 우크라이나 문화를 알리고 있는 이유, 그리고 어려운 시대에 음악과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타라스

Q. 오늘 행사에 초청받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이번 연주회는 우크라이나 독립 35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요. 이 특별한 날, 대한민국 서울에서 공연하는 것이 박사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어떤 형태의 행사든 우크라이나 문화를 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오늘 연주회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지금뿐만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빼앗겨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우크라이나 문화가 지닌 깊이를 세상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 역시 여러 문화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하는 지역의 문화와 우크라이나 문화를 서로 연결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중국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중국 전통악기 연주자를 초대해 함께 연주했습니다. 인도에 있을 때는 인도 무용수들을 초대해 우크라이나 음악과 함께 공연했고, 보츠와나에서는 아프리카 타악기 연주자들과 우크라이나 음악을 함께 연주했습니다.

문화는 단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인류를 하나의 탯줄처럼 연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한국 방문은 제게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봤지만 한국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 이후 첫 번째 연주회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는데, 당시 LA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콘서트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저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당시 거의 2천 명의 관객이 모였고, 저는 그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향해 방송도 진행됐고, 그곳에서 매우 큰 규모의 기부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제게 매우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 저에게는 한국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제가 민족음악학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한국인 친구들이 한국의 전통악기를 비롯해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 방문은 제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Q. 앞서 말씀해주셨듯 오랜 시간 세계 여러 나라의 관객들에게 우크라이나 음악을 소개해 오셨는데요.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우크라이나 음악의 어떤 점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모든 문화가 저마다 특별함과 고유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저는 그저 아직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것, 혹은 오랫동안 억눌려 온 문화적 요소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제국의 지배 체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가장 위에는 제국의 힘이 존재했고, 나머지 문화들은 그 주변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11세기부터 키예프 루스라고 불리는 하나의 국가로 계속해서 존재해 왔고, 음악적 전통 역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문화가 억압받던 시기에는 인쇄 기술도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고, 교육 체계 역시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전과 음악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달해 왔습니다. 예술과 춤을 통해서도 전달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었습니다. 노래에는 가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처음에는 음악을 통해 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단순히 우크라이나 음악의 ‘독특함’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우크라이나 문화가 가진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가 식민 지배나 외부의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람들은 음악과 구전 전통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가게 됩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작곡가들이 자신의 음악에 민속적 요소를 담았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문화적 표현들이 거의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Q. 오늘 연주해주실 곡들 가운데 한국 관객들이 특히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곡이 하나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한 곡만 꼽을 수 있었다면, 아마 오늘 한 곡만 연주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비교적 짧은 곡들을 여러 곡 준비했습니다.

후기 바로크 시대부터 시작해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를 거쳐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 음악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특정한 한 곡에 집중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대의 음악을 다양하게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어떤 곡을 마음에 담아갈지는 관객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손윤희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음악이 한 나라의 정체성과 기억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단순히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음악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음악은 한 나라의 정체성과 기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치를 발전시키고 다시 회복하는 데도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역시 대부분 예술과 음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방식도 있겠지만, 저는 음악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우크라이나 음악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의 다른 음악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문화와 비우크라이나적 요소들이 서로 협업하고 연결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서로 다른 문화를 함께 어우러지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저 역시 우크라이나어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전쟁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모습을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푸념하기 위해서도, 울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안으로 움츠러들기보다는 밖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의 어두운 시기 역시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좋은 것에 집중해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것과 긍정적인 것,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극은 우리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악에 맞서고, 그것을 밀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열린 마음을 통해 악의 힘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나의 것’과 ‘너의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가 가진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