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기업 180곳 집적한 원주…‘지역 첨복단지’ 지정 놓고 국가 메드테크 거점 도전
의료기기에서 의료기술(MedTech)로...국가 메디테크(MedTech) 핵심거점 도약 특별법 개정안 법사위 통과, 지정신청 선제적 준비에 행정력 집중
30년 가까이 의료기기 산업을 육성해 온 원주시가 ‘지역첨단의료복합단지’ 지정을 위한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 의료기기 생산액이 지난해 12조 원을 넘어서는 등 시장이 성장하는 가운데 기업과 병원, 대학, 건강보험 공공기관이 한 도시에 집적된 원주의 산업 구조를 인공지능(AI)·의료데이터 중심의 국가 메드테크(MedTech) 거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원주시에 따르면 ‘첨단의료복합단지 육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지난 7월 2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수정 가결돼 본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다.
개정안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역첨단의료복합단지 지정계획을 수립하고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의 신청을 받아 기존 의료산업 특화지역을 지역첨단의료복합단지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대구·경북과 충북 오송 등 국가 주도 첨단의료복합단지 외에도 지역별 산업 특성을 활용한 별도 거점을 조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관련 법안은 지역의 의료 인프라와 AI 의료기기, 디지털헬스케어 등 특화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역첨단의료복합단지 지정·지원 근거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시행되더라도 원주가 자동으로 첨복단지로 지정되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지정계획 수립과 강원특별자치도의 신청, 정부 평가 등 후속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원주시는 제도 시행에 맞춰 신청할 수 있도록 산업·연구·임상 인프라를 하나의 지역특화 모델로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원주가 내세우는 가장 큰 경쟁력은 오랜 기간 구축한 의료기기 산업 집적도다. 원주시는 1998년 의료기기 창업보육을 시작한 이후 기업 생산시설과 연구·시험·인증 지원체계를 단계적으로 조성해왔다. 2006년 의료기기 분야 매출은 1536억 원, 고용은 약 1000명 수준이었지만 산업기반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2024년 원주시가 공개한 자료에서는 지역에 의료기기 관련 기업 약 180곳이 집적된 것으로 파악됐다. 시는 기존 제조업 중심 의료기기 산업을 AI와 디지털헬스케어 분야로 전환하기 위해 같은 해 강원 AI 헬스케어 글로벌 혁신특구 사업에도 참여했다. 특구는 2024년 6월부터 2028년 5월까지 운영되며 국비 약 78억 원을 포함해 총 126억 원이 투입된다.
원주가 첨복단지 유치에 다시 나서는 배경에는 국내 의료기기 시장의 성장도 자리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5년 국내 의료기기 생산액은 12조3558억 원으로 전년보다 8.1% 증가했다. 수출액은 7조6395억 원으로 2.2% 늘었으며 무역수지는 4789억 원 흑자를 기록했다. 의료기기 산업은 2020년 이후 6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했다.
단순히 의료기기를 제조하는 것에서 AI와 의료데이터, 임상시험, 인증과 해외시장 진출까지 연결하는 산업생태계 구축이 중요해진 이유다. 의료기기는 제품 개발 이후 안전성과 성능 검증, 인허가, 의료현장 평가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기업 주변에 병원과 연구기관, 시험·인증기관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돼 있는지가 사업화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원주는 이 부분에서 다른 산업도시와 차별화된 구조를 강조하고 있다. 원주의료기기산업진흥원이 창업보육부터 연구개발, 시제품 제작, 시험·평가, 국내외 인증과 수출을 지원하고 있으며 혁신도시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등 보건의료 관련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과 원주의료원 등 의료기관의 임상 기반,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를 비롯한 지역 대학의 의료공학·AI 인력도 활용할 수 있다. 지난 3월에는 강원특별자치도와 원주시, 병원, 공공기관, 대학과 산업계 등 19개 기관·단체가 첨단의료복합단지 지정을 위한 협력체계를 공식화했다.
시는 이 같은 기반을 ‘AI 데이터기반 국가 메디테크 혁신허브’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기존 의료기기 제조산업에 건강보험과 의료데이터, 병원의 임상연구, AI 기술을 결합해 제품 연구에서 실증과 인증, 양산, 해외 진출까지 한 지역에서 연계할 수 있는 산업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첨복단지 공간도 단일 산업단지에 집중하기보다 도시 전체를 기능별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구상하고 있다. 서원주역세권은 의료AI 분야의 중심거점으로, 기업도시는 제조업의 AI 전환과 양산·스케일업 거점으로 육성한다. 신평농공단지에는 핵심 연구시설을 집적하고 태봉산업단지는 신규 기업 유치와 투자·수출을 지원하는 성장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혁신도시의 보건의료 공공기관과 병원·대학도 연구개발 단계부터 연결한다. 실제 의료현장과 시민 생활공간을 활용한 실증까지 가능하도록 해 도시 전체를 연구개발과 임상, 제조, 사업화가 이어지는 메드테크 플랫폼으로 구축한다는 목표다.
다만 첨복단지 지정이 곧바로 지역경제 성장과 기업 유치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단지 지정 이후 실제 국비와 연구시설을 얼마나 확보하는지, 의료기기 기업이 지역에 새롭게 투자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얼마나 만드는지, 대학과 병원의 연구 결과가 제품과 매출로 연결되는지를 장기간 확인해야 한다.
기존 기업을 원주에 머물게 하는 것도 과제다. 연구개발과 창업지원 인프라를 갖추더라도 성장한 기업이 생산시설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 산업 집적에 따른 경제효과가 약해질 수 있다. 첨복단지 전략에서 기업의 창업뿐 아니라 양산시설과 본사, 연구인력을 지역에 정착시키는 스케일업 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국제시장 진출 지원 역시 성과를 가르는 요소다. 지난해 국내 의료기기 수출이 7조6000억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원주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으로 판매망을 확대할 수 있도록 국제인증과 임상·사용적합성 평가를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식약처도 최근 의료기기 수출시장 다변화와 제조·수입업체 및 관련 종사자 증가를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주요 변화로 제시했다.
구자열 원주시장은 원주가 의료기기산업 클러스터와 기업지원체계, 보건의료 공공기관의 데이터·보험 전문성, 병원의 임상역량을 한 도시에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역첨단의료복합단지 지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주시는 기존에 수립한 ‘원주첨단의료복합단지 조성계획’을 보완하고 강원특별자치도와 관계기관 협력을 강화해 보건복지부의 지정계획이 마련되는 즉시 신청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방침이다.
원주의 첨복단지 도전은 1998년 시작한 의료기기 산업을 약 30년 만에 AI·데이터 기반 산업으로 다시 전환하려는 시도라는 의미가 있다. 180여 개 의료기기 기업과 보건의료 공공기관, 대학·병원을 실제 연구개발과 사업화 과정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법안의 본회의 처리와 정부의 후속 지정기준이 구체화되면 기업 수와 연구개발 투자, 고용, 수출액 등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원주의 국가 메드테크 거점 경쟁력을 검증하는 과정도 본격화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