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 칼럼] 가상자산이 ‘범죄수익 세탁소’가 돼서는 안 된다
자금세탁 폭증은 범죄 생태계의 변화…이재명 정부, 범죄수익 추적·환수 체계 전면 강화해야
[뉴스타운/이미애 보도국 국장] 보이스피싱과 마약, 불법도박, 투자사기 등 각종 범죄가 지능화하면서 범죄수익을 숨기고 세탁하는 수법 역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제 범죄자들은 현금이나 차명계좌에 돈을 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범죄수익을 가상자산으로 전환한 뒤 여러 전자지갑과 계정을 거쳐 해외로 이동시키고, 다시 현금화하는 방식으로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금세탁이 개별 범죄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전문화된 범죄 산업으로 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경제신문이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가상자산 불법행위 적발 1,529건 가운데 자금세탁이 1,214건으로 79.4%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 8건이었던 자금세탁 적발 건수가 올해 상반기에만 1,214건으로 크게 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수치 자체만 보더라도 범죄수익이 가상자산을 통해 이동하는 방식에 대한 국가의 대응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과거에는 범죄조직이 직접 투자사기나 불법도박 등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범죄수익을 세탁했다면, 이제는 범죄수익을 넘겨받아 가상자산으로 바꾸고 여러 지갑으로 분산한 뒤 해외로 이동시키는 전문 자금세탁 조직까지 등장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과 돈을 세탁하는 조직, 해외로 이동시키는 조직, 이를 다시 현금화하는 조직이 역할을 나누는 것이다. 범죄의 분업화·조직화·전문화가 이미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셈이다.
◇ 범죄자는 국경을 넘는데 수사는 국경 앞에 멈춰서는 안 된다
가상자산은 기술적으로 빠르고 국경의 제약이 적다는 특성이 있다. 범죄자들은 다수의 전자지갑과 해외 거래소, 개인 간 거래 등을 이용해 자금을 쪼개고 반복적으로 이동시킨다. 자금의 흐름을 복잡하게 만들어 범죄수익의 출처와 최종 목적지를 감추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발생한 범죄수익이 해외 지갑으로 이동하면 수사는 국가 간 사법공조와 정보 확보라는 또 다른 장벽에 직면하게 된다. 문제는 범죄자의 기술 발전 속도와 국가의 대응 속도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자가 돈을 숨기는 기술이 수사기관이 돈을 추적하는 기술보다 앞서간다면 법과 제도는 결국 범죄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사건이 발생한 뒤 계좌를 들여다보고 돈이 해외로 빠져나간 뒤 공조를 요청하는 방식만으로는 전문화된 자금세탁 조직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어렵다. 이제는 사후 추적 중심에서 벗어나 범죄수익의 발생 단계부터 이동·전환·분산·은닉·환전·최종 사용 단계까지 전 과정을 추적하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 이재명 정부,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감 있는 범죄수익 차단 대책’이다
이 문제에서 정부의 책임은 분명하다. 특히 이재명 정부는 가상자산을 단순한 금융·투자시장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범죄 대응과 금융안보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범죄수익이 가상자산으로 전환되는 순간부터 해외로 빠져나가는 과정까지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는 범정부 차원의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경찰과 검찰, 금융정보분석원(FIU), 관세당국, 국세당국 등 관련 기관의 정보를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가상자산 거래 흐름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인력과 기술 역량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범죄수익으로 의심되는 가상자산을 신속하게 동결하고 해외 이전을 차단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해야 한다. 범죄수익 환수는 수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수사의 출발점부터 함께 설계돼야 한다. 범인을 검거하는 것만으로 수사가 끝나서는 안 된다. 범죄자가 범죄수익을 보유하고 있다면 범죄의 경제적 동기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 '몇 명을 잡았나’보다 ‘얼마를 되찾았나’를 봐야 한다
수사 성과의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범죄자를 몇 명 검거했는지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범죄수익 가운데 얼마를 추적하고, 얼마를 동결했으며, 얼마를 환수했는지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특히 보이스피싱이나 투자사기처럼 피해자가 명확한 범죄의 경우에는 환수된 범죄수익이 실제 피해자에게 얼마나 돌아갔는지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 돼야 한다.
가상자산 거래소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상거래 탐지와 고객 확인, 의심거래 보고가 단순한 형식적 절차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단기간에 반복적으로 지갑을 이동하거나 해외로 대규모 자산을 이전하는 등 명백한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면 보다 적극적인 위험관리와 관계 기관과의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물론 정상적인 가상자산 이용자의 재산권과 금융거래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무차별적인 거래 제한이 아니라 객관적인 위험 기준과 적법한 절차에 기반한 정교한 차단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 범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돈을 잃는 것’이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범죄의 비용을 높여야 한다. 범죄로 수백억 원을 벌어도 일부 형량만 감수하면 된다는 잘못된 계산이 가능하다면 범죄조직의 경제적 유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범죄수익을 끝까지 추적해 찾아내고 해외로 빼돌린 자금까지 환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면 범죄의 수익성 자체를 떨어뜨릴 수 있다.
결국 ‘범죄수익은 끝까지 추적해 반드시 환수한다’는 국가의 확고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범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검거가 아니다. 범죄로 축적한 돈과 조직의 운영자금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장은 범죄자의 은신처가 아니라 범죄수익의 흐름일 수 있다.
◇ 가상자산은 범죄자의 비밀금고가 아니다
가상자산 자체를 범죄의 도구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가상자산은 새로운 금융기술이자 산업의 한 영역이다. 기술의 발전을 막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범죄수익을 세탁하는 통로로 악용되는 것까지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상자산 시장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규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거래는 보호하면서 범죄수익만 정밀하게 찾아내는 고도의 추적·차단 시스템이다.
범죄는 이미 전문화되고 국경을 넘어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수사 역시 전문화되고 국제화돼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이 문제를 더 이상 개별 사건이나 금융시장 관리 차원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말고 범죄수익 추적·환수에 관한 범정부 종합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범죄수익이 해외로 빠져나간 뒤 뒤늦게 쫓아가는 수사가 아니라, 돈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포착하고 차단하는 선제적 수사 체계가 필요하다.
피해자의 삶은 무너졌는데 범죄자는 익명의 지갑 뒤에서 범죄수익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수사는 범인을 잡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범죄로 벌어들인 돈의 흐름을 끝까지 추적하고 불법수익을 동결·환수해 피해 회복으로 연결하는 것까지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범죄수사의 완성이다.
가상자산은 혁신의 도구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범죄수익의 종착지가 아니라 범죄수익을 끝까지 찾아내 환수하는 국가라는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속도다. 범죄의 기술이 진화하는 만큼 국가의 대응도 더 빨라져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발 빠른 범정부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