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제주4.3의 강경 진압과 인명 피해는 1948년 11월부터 49년 3월 사이 겨울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박진경 시절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오늘 제주도의회 기자회견실에서는 ‘박진경 연대장 명예회복을 위한 제주도민모임’ 주관으로 박진경 연대장의 명예회복 조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늘은 6월 18일, 제주4.3사건에서 6월 18일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 두 건 발생했다. 제주도 1호 목사 이도종 목사가 남로당 폭도들에 의해 희생된 날이며, 또한 제주에 진압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11연대 박진경 연대장이 남로당 프락치 병사들에게 암살당한 날이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좌익들에 의해 박진경 연대장 악마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박진경 연대장을 4.3사건의 학살 주범으로 매도하며 연일 박진경 추모비에 훼손이 발생하고 있고, 이재명 정권에서는 박진경 연대장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검토하고 있다. 박진경 연대장의 과오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저 좌익들의 날조와 선동으로 박진경 연대장을 매도하고 있다.
박진경 연대장은 1948년 5월 6일 제주도에 부임하여 6월 18일 암살당했다. 약 40여 일정도 연대장을 맡았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군대와 인민유격대가 전투를 벌인 적도 없다. 강경 진압을 벌인 적도 없다. 제주4.3의 강경 진압과 인명 피해는 1948년 11월부터 49년 3월 사이 겨울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박진경 시절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박진경 연대장을 매도하는 대표적인 선동은 박진경 연대장이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 30만 도민을 몰살시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손선호 하사가 법정에 발언했다고 알려졌다. 손선호 하사는 남로당 프락치로 박진경 연대장 암살에서 박진경 머리에 총을 발사했던 자다. 이런 자가 박진경에게 좋은 말을 할 리 없다. 김일성에게 이승만 평가를 맡긴 격이다.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 30만 도민을 몰살시키라" 이 말의 출처는 김봉현 김민주 공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 등장하는 말이다. 김봉현 김민주는 4.3 당시 인민해방군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도망간 자들이다. 이 책에서 저 발언을 했던 사람은 박진경이 아니라 조병옥이었다. 당시 조병옥은 미군정에서 경무부장(오늘의 경찰청장)이었다.
조병옥의 발언도 사실이 아니라 폭도짓을 하다가 도망간 제주도 출신 빨갱이 두 사람이 조병옥을 비하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다. 왜냐하면 자료마다 저 ‘휘발유’ 발언을 했던 사람으로 조병옥, 박진경, 이승만이 등장한다.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전가의 보도처럼 ‘휘발유’ 발언을 꺼내어 여기저기 들이대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빨갱이에게 대한민국을 평가할 권리는 없다.
좌익 자료에는 박진경 연대장이 주민 3,000명을 체포했다는 주장이 단골로 등장한다. 이 역시 선동이다. 당시 5.10 제헌선거 당시 남로당 인민유격대 측에서는 주민들을 강제로 산으로 올려보냈다. 5.10제헌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동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주민들은 취사도구를 챙겨서 단체로 산으로 올라가 며칠씩 산에서 기거했다.
박진경 연대장이 체포했다던 사람은 이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체포가 아니라 ‘수용’이었다. 박진경 연대장은 산에서 이들을 데려와 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주동자를 제외하고 전부 석방했다. 체포한 남로당원 중에도 죄가 없다면 남로당 간부들도 석방했다. 4.3은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총살에 처해지는 험악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남로당 간부까지 석방해 준 연대장은 박진경이 유일한 연대장이었을 것이다.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좌익 자료에 정확하게 나타난다. 제주인민해방군 초대 사령관 김달삼은 북한에서 브리핑용으로 쓰기 위해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제주4.3폭동의 준비와 유격대의 활약상 등을 기록해 뒀다. 김달삼은 이 자료를 들고 월북 해주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5월 10일 제주읍에서 인민유격대 측 대표로, 사령관 김달삼과 김양근 등 2명, 경비대 프락치 대표 오일균 소령, 이윤락 정보관, 부관 등 3명, 총 5명의 비밀 회동이 있었다. 여기에서 ‘특히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진경 대령 암살은 박진경 연대장 부임 4일 만에 인민유격대 측과 국방경비대 소속 남로당 프락치 측이 모인 비밀 회동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남한 좌익들은 박진경 연대장이 강경 진압으로 양민을 학살했기에 암살되었다고 주장한다. 엄연한 허위이며 날조다. 비빌회동에서 박진경 연대장 암살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등장한다.
박진경 연대장 전임자는 김익렬 연대장이었다. 김익렬은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빌미로 내통하고 있던 자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인민유격대 측에서 김익렬과의 만남을 역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이가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국방경비대)의 산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하략) 그 후 5.10 투쟁까지는 국경(국방경비대)으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없어 우리의 활동에는 크나큰 이익을 가져왔다.’
박진경 연대장과 4.3의 강경 진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제주4.3을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고 좌익의 선동에 넘어가 박진경 연대장을 매도하는 젊은이들은 자기 스스로 무식을 자랑하는 꼴이 된다.
인민유격대와 프락치들의 비밀 회동에서 ‘가능한 한도 내에 있어서 탈출병을 적극 추진’도 결의했다. 그러자 5월 20일 9연대 남로당 프락치 병사 41명이 집단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밀 회동의 결의대로 착착 진행되었던 것이다. 1948년에도 좌익의 선동에 넘어간 주민들이 많아서 4.3은 발발했다.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깨어 있어야 비극은 찾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