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실용 추구 인도네시아와 ‘글로벌 사우스’의 자치권

- 반둥에서 브릭스(BRICS)까지

2025-04-21     김상욱 대기자

비동맹 운동(NAM=Non-Aligned Movement) 정상회담이 시작된 지 70년이 지난 현재 인도네시아는 대단한 거시적인 슬로건 보다 ‘실용적인 국제 관계’를 우선시 하고 있다.

19955년 4월 서부 자바(West Java)의 한 도시가 외교적 혁명의 숨은 무대가 됐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29개국(대부분 신생 독립 국가) 정상들이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에 모여, 냉전이라는 숨이 막힐 정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 이른바 ‘비동맹 운동’이다.

2025년 4월 70년이 지난 현재, 반둥회의로 알려진 그 모임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는 있지만, 그 회의가 재편하고자 했던 세계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했다. 이제 다극화가 지정학적 주요 동역으로 재등장하면서, 비동맹 운동(NAM)의 원칙은 그 창시자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시험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자기중심적이며 일방적인 불량 초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도널드 J.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수카르노(Sukarno)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은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륙 간 회의”(the first intercontinental conference of coloured peoples in the history of mankind)라고 불렀다. 이 회의는 평화 공존(peaceful coexistence), 주권과 영토 보전의 존중(respect for sovereignty and territorial integrity), 국가 간 평등(equality among nations), 불가침(non-aggression), 내정 불간섭(non-interference in domestic affairs)을 포함 10가지 원칙을 담은 강령을 제시했다.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올해는 정상회담 70주년이지만, 기념행사는 소박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전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재임 시절 50주년과 60주년을 성대한 행사로 기념해 왔지만, 이번에는 ‘대규모 행사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결정이 인도네시아가 ‘글로벌 사우스’에서 주도권을 재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고 SCMP가 전했다. 그러나 다른 분석가들은 이번 결정이 현직인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대통령의 외교 정책 전반의 재조정, 즉 상징적인 제스처보다 ‘실용적인 파트너십’을 우선시하는 움직임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국방부 장관 출신인 프라보워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외교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더더욱 개인적이고 효율성 중심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채택했다. 분석가들은 그가 반둥 회의를 위한 대규모 기념행사를 개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변화된 지정학적 현실, 즉 기존의 양극체제와 단극체제가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대체된 세계의 상징적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SCMP 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ISEAS-유소프 이샤크 연구소(ISEAS–Yusof Ishak Institute)의 수석 연구원이자 아세안 연구 센터의 공동 코디네이터인 조앤 린(Joanne Lin)은 “오늘날의 다극화된 세계에서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는 원래 NAM(비동맹 운동)이 주창했던 전략적 자율성 정신을 고수하면서도 결과를 낼 수 있는 유연한 연합과 협력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조앤 린은 “이러한 추세는 NAM과 같은 광범위하고 이념에 기반을 둔 집단보다는 소규모의 이슈나 이해관계 중심 집단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인도네시아가 여전히 비동맹 원칙을 고수하고 있지만, 브릭스(BRICS)와 같은 플랫폼이 참여를 위한 보다 실용적이고, 이익 중심적인 수단으로서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작년 취임 직후 인도네시아의 브릭스(BRICS) 가입을 공식 확정했다. 2009년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 주도하여 설립한 브릭스는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그리고 2024년에는 몇몇 다른 국가들도 가입하기로 했으며, 브릭스는 서구 주도의 제도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 인도네시아와 글로벌 사우스

반둥 회의 이후 1961년 공식 설립된 NAM은 냉전 시대 서방이나 동구권 어느 한쪽 진영에 대한 동맹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며 탄생했다. 현재 NAM은 120개 회원국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 정상회의는 작년 우간다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NAM의 규모와 내부적 다양성으로 인해 세계 무대에서 ‘통합된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 대학의 정치학 연구원인 크리스토프 도린-톰슨(Christophe Dorigne-Thomson)은 SCMP와의 인터뷰에서 “회원국 수가 많고, 이질적이어서,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고, 구속력 있는 약속이나 집행 메커니즘이 없어 통합된 행위자로서의 효과성이 제한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NAM의 세계적 영향력이 “부정할 수 없이 약화는 되었지만, 그 중요성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특히 냉전 이후 단극체제가 더욱 분열되고 다극화된 지정학적 환경으로 바뀌면서 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영국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Aberystwyth University)에서 아시아 지역주의와 인도네시아 외교 정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아흐마드 리즈키 우마르(Ahmad Rizky Umar)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정부가 올해 반둥 회의를 기념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놓친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행사는 “인도네시아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대규모로 교류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프라보워 전 대통령의 전임자인 위도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고(故)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셴룽 전 싱가포르 총리를 포함한 109개국 대표단을 모아 반둥 회의 60주년을 기념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 도린-톰슨은 인도네시아 현 대통령은 이러한 ‘기념 외교’(commemorative diplomacy)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행정부는 다난타라 국부펀드(Danantara sovereign wealth fund)와 학생과 임산부를 위한 무료 급식 사업과 같은 주요 프로그램에 국가 자원을 투입했다. 이는 연간 280억 달러(약 39조 8,776억 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며, 202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연간 성장률을 5%에서 8%로 끌어올리려는 정부의 야심에 찬 계획의 일환이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다난타라 국부펀드는 단순한 투자 기관이 아니라, 우리의 국영기업을 최적화하기 위한 도구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국영기업 배당금을 장기적 성장을 지원하는 산업에 투자할 뿐만 아니라, 국유 기업을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도록 변화시킬 것”이라고 포부가 대단했다.

국영기업을 관리하는 ‘지주회사’와 배당금 등을 가지고 투자하는 ‘투자회사’ 등 2개의 법인으로 구성된 ‘다난타라 국부펀드’에 대해 프라보워 대통령은 “니켈, 보크사이트, 구리 가공 등 광물 개발 및 정·제련 산업을 비롯해 인공지능(AI) 개발과 정유, 재생에너지, 식품 등 20여 개의 국가 핵심 프로젝트에 200억 달러를 투자하고, 국민의 소유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언제나 감시하도록 투명성을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도린-톰슨은 이런 맥락에서 반둥 회의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주최하는 것은 ‘긴급하거나 필요한 일로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 영국 대학의 아흐마드 리즈키 우마르의 견해와는 대조를 이룬다.

도린-톰슨은 ”프라보워는 또 강대국 외교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 회의가 수카르노 치하에서 인도네시아의 반식민지주의와 ’아프로-아시안 외교‘(Afro-Asian diplomacy)의 정점을 상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유산이 약해졌다“고 덧붙였다.

에티오피아와 지부티의 인도네시아 전 대사인 알 부시라 바스누르(Al Busyra Basnur)는 과거 기념행사를 통해 양국 관계가 강화되었지만, ’반둥 정신‘(Bandung spirit)은 기념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도린-톰슨에 따르면, 수하르토의 전직 군사 지휘관이자 사위인 프라보워는 인도네시아의 두 번째 대통령의 ’신질서 시대‘(New Order era)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시대는 수카르노의 아프로-아시아주의를 희생하고, 서방 파트너 및 국제 금융 기관과 더욱 긴밀히 협력했다.

프라보워의 정당인 게린드라(Gerindra)의 선언문은 NAM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다고 주장하며, 인도네시아의 외교 정책은 ’국가 이익에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린-톰슨은 ”중요한 상징적 움직임이 없는 한, 인도네시아는 아프리카와 다른 글로벌 사우스 파트너들과 원칙적이고 공평한 참여에 대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21세기 세계의 비동맹운동(NAM)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국가에서 NAM의 지속적인 관련성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옵서버 연구 재단(Observer Research Foundation)의 부(副) 연구원 사미르 바타차리아(Samir Bhattacharya)는 ”NAM이 주창하는 평화 공존의 기본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정학과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아프리카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특히 ”강대국 간의 경쟁과 현실 정치가 오늘날의 국제 관계를 점점 더 규정하는 세상에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주권, 불간섭, 자치권과 같은 NAM의 핵심 원칙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 아세안)과 같은 지역 단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조앤 린은 ”아세안이 더 이상 NAM과 명시적으로 연대하지는 않지만, 비동맹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미·중 경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려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과 같은 국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계 질서가 더욱 다극화됨에 따라 비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세계 무역과 공급망에 크게 의존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미·중 갈등이 고조됨에 따라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남중국해, 대만 해협,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전략적 분쟁 지역들은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여지를 더욱 좁힌다.

싱가포르 S. 라자라트남 국제대학원의 선임 연구원이자 인도네시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인 알렉산더 아리피안토(Alexander Arifianto)는 ”프라보워 체제 아래에서 인도네시아는 외교적 역량을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서, ”다른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으로 브릭스(BRICS)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라보워는 브릭스에 가입함으로써, 이 그룹에 대한 전임자의 신중한 접근 방식을 뒤집었다. 전임자의 접근 방식은 이 블록에 가입하면 자카르타가 중국과 러시아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비동맹적 입장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2023년 초에 브릭스(BRICS)에 가입하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위도도 대통령은 주저하며 미국, 일본 등 36개국이 포함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입을 옹호했다.

아리피안토는 서방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브릭스를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지정학적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다른 분석가들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관세가 세계 무역을 뒤흔들 위협에 처한 시기에 인도네시아가 브릭스에 가입하면 시장과 투자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트럼프 관세 정책과 더 광범위한 미·중 무역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는 여전히 많은 글로벌 사우스에게 미지수이다.

인도네시아는 많은 아세안 이웃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보복보다는 미국과의 협력을 촉구해 왔다. 베트남과 태국은 관세율 인하와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미 워싱턴에 접촉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접촉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리피안토는 대부분 국가가 지역적 대응을 조율하기보다는 백악관과 직접 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을 달래려는 노력이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 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그는 ”국가들이 내향적인 방향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의 경제적 복지에 집중하려 할 ​​것이며, 보다 많은 양자 및 소규모 협력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처럼 역사적으로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옹호해 온 국가들이 이제 그 주장을 뒤집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이 보호무역주의나 개발주의 정책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고 되물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이 계속 고조됨에 따라,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국가들은 주요 강대국 어느 쪽의 압력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적인 외교 정책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는 비동맹 원칙을 고수하고 싶어한다고 에버리스트위스 대학교의 우마르는 말했다.

하지만 도린-톰슨은 개방적인 무역과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성으로 인해, 무역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립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욱 어려워졌다며, ”특히 주요 강대국들이 모호성을 덜 용납하고, 외교 및 군사 분야에서 지지를 모으려 하면서 기동의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압력은 아세안 국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립과 비동맹 또는 다중동맹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입장을 유지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