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사건] 79년 만에 일부 자료 보내온 기시다

2024-09-06     김상욱 대기자

독도는 일본 땅이다. 위안부는 보상했다. 강제징용은 없었다. 생체실험은 증거가 없다. 그리고 우키시마호는 사고였다.”

지금까지 일본이 고집스럽게 줄곧 주장해 온 말들이다. 이 말들에는 일제 강점 식민 지배 시대를 전면 부정하고, 모든 잘못은 조선인으로부터 나왔다. 일본은 할 일을 다해왔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국의 각종 요구들을 무시해왔다.

살인자 일본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항변할 수 없다. 요즘 회자되는 입벌구라는 말이 시중에 나돈다. 입만 벌리는 구라(거짓말) 친다혹은 입벌개구입만 벌리면 개구라 친다는 심한 욕설까지 거리에 나돌고 있다.

일본은 또 이랬다.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지 조선은 아니다며 영원히 한국을 일본이 좌우할 수 있는 나라로 치부하는 오만함으로 보여 왔다. 이런 일본에 대해 일부에서는 미칠 광()‘을 말한다. 그들은 상식에서 벗어난 아주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강하게 비난한다. 한자 풀이로 보면 ()의 왕()‘이라는 다소 긍정적인 풀이를 할 수 있지만, 결국 개 같은 왕이라는 뜻일 게다. 일본은 다수의 한국인에게 그런 존재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6일 한국을 방문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가 퇴임하기 전에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기시다는 3년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의 치적으로 한일관계 개선을 내우고 있다. 치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한일관계를 개선시켰다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일방적인 양보에 이뤄진 것이다. 대한(對韓) 압박을 일삼아온 기시다의 윤 대통령의 노력을 가로챘다고나 할까? 과정이야 어쨌든 한국 외교는 상대에 절하는 외교에 불과했다.

그런 기시다가 한국에 오면서 우키시마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가지고 왔단다. 5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승선자 명부가 79년 만에 한국에 왔다. 일본은 역시 그동안 그런 문건 자체가 없다고 주장해 온 터였다.

일본은 지금까지 명부 존재 자체를 은폐했으며, 명부 존재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한국 정부의 제공 요청을 무시해왔다. 그런데 기시다 후미오가 6일 방한 전날 명부 일부를 전달해 온 것이다. ·일 관계 개선의 흐름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후임자에게도 한국은 압박하면 통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우리(일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로 보인다.

조선인(한국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1945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명부는 2024년 한 일본인 언론인의 정보 공개로 사건 발생 79년 만에 최초로 공개됐다.

그동안 살인마 일본은 우키시마호 유족들의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선자 명부를 승선 시 작성해 배에 비치한 것이어서, 배가 침몰할 당시 상실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명부와 비슷한 문서의 존재도 밝히지 않았으나, 한 프리랜서 일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에 일본 후생노동성은 올해 5월 일본 해군과 일본통운 등 기업이 작성한 문서 3종류를 공개함으로서 드러났다.

공개된 3종류의 문건 중 하나인 아오모리현의 오미나토(大湊) 해군시설부 승선명부표지에는 “(1945) 824일 승선, 총원 2429이라고 적혀 있음이 드러났다. 이 명부엔 직종, 성명, 생년월일, 본적지가 기록돼 있지만, 그 부분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가려진 채로 공개됐다.

일본통운 오미나토 지점이 남긴 우키시마마루 승선 조선인 명부에는 144, (1945) 822일로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미야자키 마사히사 후생노동성 부대신(차관)은 문서 공개 직후, 중의원(하원) 외무위원회에 출석, “승선자 등의 '명부'라고 이름 붙은 자료가 70개 정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모두 구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자료로 후생노동성의 전신 조직부터 계속해 보유하고 있었다. 법령에 근거한 승선자 명부가 아니라 승선을 예정하고 있었던 사람이 기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우키시마호는 1945822, 홋카이도의 일본 해군 오미나토항 인근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배에 태워 부산으로 향해 출항시킨 해군 수송선이다. 이 선박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침몰당했다.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해저 기뢰를 건드려 폭침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인 유족 등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했고, 승선자 75008천 명 중 수천 명이 숨졌다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에 진실규명을 요구해왔던 사건이다. 폭발의 원인을 둘러싸고, 배에 함께 탔던 일본 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의 보복이 두려워 자폭했다는 한국 측 주장과 당시 미군의 명령대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고 마이즈루만 내에 부설했던 미군의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일본 측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공식 발표에서 조선인 승선자 3725, 사망자 524, 실종자 수천 여 명으로 집계했으나, 현지 주민의 목격담에 따르면 사망자만 1천 명이 넘고, 당시 생존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7천 명 이상이 승선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1만 명이 넘게 승선하였고 최소 5천 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존재한다.

일본은 사고 후 수년간 선체를 인양하거나 유해를 회수하지 않아 의혹을 키웠다. 의도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생존자와 유족들은 1992년 일본 정부의 안전관리 의무 위반을 문제 삼아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2004년 패소가 확정됐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는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는데, 한국에는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2005)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2023년에 마이즈루시 주민들로 구성된 단체인 '추도회'에서 희생자들의 집단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 3곳을 찾아냈다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장소와 자료들이 밝혀지도록 한국 정부의 노력은 물론 일본 정부의 인도주의적이고 상식적인 진실 규명과 그에 따른 배상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현재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 중 3명만이 살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