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PLY 박병훈 대표와의 인터뷰 '한국 신발의 역사'편

2018-05-14     김한정 기자

충무로 42번지에 위치한 충무아트홀에서는 2018년 5월 12일 오후 ‘PLAN PLY 박병훈 대표’와의 인터뷰 '한국 신발의 역사'편이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서울의 고무신 공장에서 시작돼 내년 100년을 맞는 우리나라 신발산업은 그 동안 부산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1950년 한국전쟁이 피란민이 대거 부산에 몰려들어 노동집약형인 신발산업에 풍부한 노동력이면서 안정적인 수요층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고무신생산에서 현재의 갑피와 발바닥을 연결한 새로운 신발이 탄생하였으며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의 기술과 생산설비가 유입되면서 한 단계 도약 1970년대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신발 주력제품은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뀐다.

삼화고무와 계약한 나이키의 첫 주문량은 운동화 3천 켤레였는데 이후 수 만 켤레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나이키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나이키와 삼화고무는 5년 독점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국제상사와 동양고무등도 나이키 운동화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 각국의 바이어들은 부산으로 몰렸다 1970년∼1980년대 부산에서 신발산업의 고용 인구는 5만 명 이상이었다. 종업원이 1만 명이 넘는 신발회사는 4곳이었다.

국내 신발산업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불안정한 주문으로 인한 수출 부진, 가파른 원화 절상, 제조비 상승 등에 따른 원가 압박 등의 영향으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한 것이다.1990년대 기준으로 노무비가 제조원가의 25∼30%를 차지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전체 수출의 95%가 자사 브랜드 제품이 아닌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이었다. 독자 브랜드로 경쟁하는 게 아닌 OEM 생산 방식은 당장 많은 돈을 벌게 해줬지만, 나이키나 리복 등 외국 업체가 이른바 `갑이'었기 때문에 거래계약이 해지되면 모든 게 끝나는 함정과도 같았다.

고무신에서 시작한 국내 신발산업은 침체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부산시와 관련 기관은 신발 공정 자동화와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신발산업협회 회장을 지낸 권동칠 트렉스타 회장은 "국내 신발산업은 최근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해외에 생산시설을 둔 신발 대기업은 연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섰고, 국내 생산업체는 자동화를 통한 생산원가 절감에 매진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월 부산시 부산진구 개금동에 '한국신발관'(K-Shoes Center)이 개관했다. 한국 신발산업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신발 박물관, ‘한국신발관’(K-Shoes Center)이 지난 2월 26일 개관했다. 부산 도시철도 2호선 개금역 2번 출구로 나와 7분 정도의 위치에 있다.

저희 목표도 “Again Busan”입니다.
<발췌 신발산업진흥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