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환타지아’ 연재를 마치며(1/4)
[임성빈 교수의 ‘빛의 환타지아’]
16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은 150년경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가 제안했던 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 또는 천동설(天動說, geocentric theory)을 믿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1543년에 폴란드의 수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그의 저서 “천구(天球)의 회전(回轉)에 관하여(One the Revolution of Celestial)”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임을 부정하는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 즉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c theory)을 제창하였을 때 그것은 근세에 들어와 인류가 첫 번째로 맞은 혁명과 같은 사건이었다.(코페르니쿠스는 이 책이 출간되던 해에 사망함으로써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음)
후에 괴테는 “모든 발견과 주장된 의견들 중에서 코페르니쿠스의 과학만큼 인간의 정신에 그토록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은 결코 없었다.”라고 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으로부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의 순서로 행성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각 행성들은 일정한 속도로 태양주위의 원 궤도를 돌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관측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탈리아의 사제이자 철학자였던 브루노(Giordano Bruno)는 지동설을 지지하면서 당시의 가톨릭교리 전반에 걸쳐 의문을 제기하는 활동을 벌리고 다니다가 1592년 체포되어 교황청의 종교재판에서 이단(異端, heresy)이라는 판결을 받고 8년 후 화형을 당했는데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지동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지동설의 지지자이던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역시 1599년 이단과 음모의 혐의로 스페인 정부에 체포되어 나폴리 감옥에서 심한 육체적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저항하였다. 1602년 무기형을 선고받고 27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학계의 청원과 당시의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그 후에도 교황청의 재판을 받다가 프랑스로 피하여 파리 수도원에서 조용히 생애를 마쳤다.
한편 당시 최고의 관측천문학자였던 덴마크의 브라헤(Tycho Brahe)는 관측기계를 정비하고 행성, 특히 화성(火星)의 위치를 관측하여 많은 정밀한 자료들을 남겼는데 그의 조수 케플러(Johannes Kepler)는 1609년에 그 자료들을 정리하여 행성의 궤도가 사실은 원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임을 밝히는 등 행성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 즉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했다.
같은 무렵에 이탈리아의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1632년 출간된 그의 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함으로서 거의 2,000년간이나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바탕이 되어온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木星)의 위성 4개를 발견하였으며 또 물체의 낙하운동(落下運動, motion of falling body) 실험으로 역학의 법칙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는 행성들의 공전궤도가 타원이라는 케플러의 견해보다는 원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믿었다.
여하튼 갈릴레이는 이 일로 교황청의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에 반대하는 신학자에게 “성령의 의도는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가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지 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갈릴레이는 브루노나 캄파넬라 등과는 달리 일생 동안 정부나 교회의 권력자들과 관계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그의 주장을 취소하고 친구의 성에 구금되도록 하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단에 관한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는데 일단 종교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자신의 뜻을 지키며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교회의 세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로 도망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꺾어야 했으므로 갈릴레이는 결국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1687년에 영국의 뉴턴(Isaac Newton)은 케플러의 법칙과 갈릴레이의 실험 등을 종합 정리하여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의 법칙과 운동의 3법칙을 발견함으로서 근대물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뉴턴역학으로 행성이나 달과 같은 위성의 운동을 지동설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음이 밝혀져 새로운 천체역학(天體力學, celestial mechanics)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유죄 판결을 받은 1633년 6월로부터 약 360년이 지난 1992년 10월 31일에야 갈릴레이의 완전 복권을 선언함으로서 지동설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을 즈음 지동설을 주제로 “세계론(世界論, The World)”(이 책은 데카르트의 사후에 출판되었음)을 집필하였으나 갈릴레이가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출판을 중지하였다.
그 후 그는 방법서설(方法序說, Discourse on the Method), 성찰(省察, Meditations) 등을 잇달아 출판하면서 신앙의 이해를 목표로 하는 중세의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을 극복하고 근세철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는 방법적 회의(懷疑, skepticism)를 통하여 의심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임을 발견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아는 완전하지 않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하고 한계가 없는 어떤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으므로 완전하고 한계가 없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신(神, God)'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과 물체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 mind-body dualism)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심신이 결합된 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에 가서는 반대로 물(物/身)과 심(心)의 합일(合一, unity)을 설명하고 그 합일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적인 의식의 표현이 정념(情念, pathos)이며 특히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헛된 욕망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물심이원과 합일이라는 모순은 뒤에 주요한 철학적 과제가 되는데 여하튼 그의 물심이원론은 결과적으로 과학을 종교로부터 분리시켜 과학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종교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신이나 영혼(靈魂 spirit), 정신(精神, mind)이 완전히 배제된 기계론적 과학관이 정립되었다. 그 이후 자연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찬란한 현대문명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언젠가는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모두 이해하여 전지자(全知者, omniscience one)의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소위 과학만능주의(科學萬能主義, scientism)가 활개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문명이 지나치게 물질에 치우쳐 인간을 정신적으로 매우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데카르트는 결국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많은 현대인들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신과 영혼을 잊고 살게 되는 빌미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1859년에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생명체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국지적으로 적응(適應, adaptation)하며 돌연변이가 등장하기도 하나 그 후에는 자연선택에 의한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리에 따른다고 하는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을 출간하자 과학계는 지동설이 발표되었을 때 못지않게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진화론(進化論, Doctrine of Evolution)은 공격받을 여지가 많이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진화의 중간단계에 있는 종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었으며 따라서 다윈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860년 6월 옥스퍼드대학에서 열렸던 영국과학발전협회 연례총회에서 진화론을 반대하는 종교계를 대변하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주교는 다윈의 책이 허황한 가설에 입각해 있고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다윈의 몇몇 안 되는 지지자 중의 하나였던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동물학자, “멋진 신세계”를 쓴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임)에게 “헉슬리 씨 조상 중 유인원은 할아버지 쪽입니까, 할머니 쪽입니까?”라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헉슬리는 “심각한 과학문제를 토론하는 장소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유명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유인원과 혈족관계를 가지는 것이 더 낫다.”라고 답하여 강당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후에도 진화론에 대해서는 종교적, 생물학적, 지질학적 반론이 많이 제기되었었지만 여러 고생물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이제는 약 1억 5천만 년 전에 파충류가 어떻게 조류로 진화했는지, 약 5천만 년 전의 하마와 비슷한 육상포유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고래가 되었는지, 또 약 700만 년 전에 침팬지와 갈라진 인류가 어떤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인류가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수많은 증거가 확보되었다.
물론 아직도 세부적인 진화과정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상당히 있지만 전체적인 진화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지동설과 함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론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유전자생물학(遺傳子生物學, genetic biology)은 진화가 지금도 그리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진화론은 이제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