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25) 인더스(Indus)문명(2/3)

[임성빈 교수의 ‘빛의 환타지아’]

2017-09-06     임성빈 교수

하라파문명(1/2)

이 지역에는 가하-하크라 강 지역에 500여개, 인더스 강 지역에 800여개 등 모두 1,000여 개의 도시와 주거지역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하라파, 모헨조다로, 로탈(Lothal), 돌라비라(Dholavira)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들은 작은 마을들이 차차 커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도시계획 하에 건설된 계획도시들이었다.

하라파문명의 중심지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인 하라파는 완전한 격자형(格子形, gridiron) 가로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민들이 사는 시가지와 거대한 성채(城砦, citadel)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성채는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의 지구라트보다 더 컸으며 성문은 매우 정교하고 앞선 기술로 만들어졌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그 안에 조선소(造船所, dockyard), 곡물창고(穀物倉庫, granary), 창고, 벽돌공장 등이 있었는데 특히 조수(潮水, tide), 파도(波濤, wave), 해류(海流, current) 등을 주의 깊게 조사하여 선거(船渠, dock)를 축조하는 기술이 뛰어났었다. 그들은 이를 조사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였으며 야금술(冶金術, metallurgy)도 발전시켜 새로운 기술로 구리, 청동, 납, 주석 등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모헨조다로 역시 완전한 격자형 가로를 가진 계획도시로서 주위가 4~5km 정도인 이 도시도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높은 곳에 있는 성채에는 신관왕(神官王, priest king)이나 신관들이 살았으며 아랫마을(lower town)에는 일반 시민들이 살았다. 성채 내에는 대형 목욕탕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길이 12m, 폭 약 7m, 깊이 2.4m나 되는 벽돌로 만든 커다란 욕조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수많은 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몇몇 작은 방에도 나무로 만든 작은 욕실이 있었다.

신관왕이나 신관들은 이 대형목욕탕에서 목욕재계한 후 인더스 여러 도시의 풍작이나 번영을 기원했는데 이런 대형 목욕탕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모헨조다로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성채의 서쪽 성벽에는 길이 45m, 폭 23m의 거대한 목조 곡물창고가 있어 각지로부터 배나 소달구지로 운반해온 곡물을 보관하였는데 바닥에는 통풍을 위해 구멍도 뚫어놓았다.

아랫마을에는 굽은 길은 하나도 없었고 반듯반듯하게 뻗은 도로 중 넓은 것은 폭이 9m나 되었으며 도로로 구획된 블록에는 크고 작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이 도시에는 3~4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는데 집은 모두 구운 벽돌로 지었으며 건물이 안마당을 둘러싼 형태로 되어있었다.

도로 쪽의 벽에는 방범이나 햇볕 방지는 물론 소음이나 악취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창을 내지 않았으며 방은 적게는 두 개에서 많게는 십여 개가 있었다. 집에는 집집마다 우물(또는 공동우물)과 욕실이 있었는데 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목욕은 신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의식(宗敎儀式, ritual)이었다.

이들은 화장실도 수세식(水洗式, flushing)이었으며 욕실이나 화장실에서 흘러나온 물은 벽에 만든 배수로를 통해 오늘날의 정화조(淨化槽, septic tank) 역할을 하는 배수항아리로 흘러들어간다. 밖에 묻어놓은 배수항아리에서는 물의 일부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한편 오물이 침전되고 난 후 넘치는 물은 배수로를 통하여 하수도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들 하수시설(下水施設, sewage system)들은 구운 벽돌로 단단히 만들어져 절대 새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더군다나 곳곳에는 쓰레기를 제거하기 위한 맨홀까지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완벽한 하수시설을 갖춘 도시는 어느 문명에도 없었으며 같은 지역의 오늘날 시설보다도 오히려 앞선 것이었다.

모헨조다로의 남쪽이자 지금은 건천이 된 가하-하크라강 하구의 바닷가에 있던 돌라비라는 해상교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돌라비라 역시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와 마찬가지로 잘 계획된 도시로서 남쪽에는 긴 성벽에 둘러싸인 성채부가 있었고 북쪽에 아랫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큰 경기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외국 손님들을 위한 스포츠 이벤트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성채부 북문 근처에서 인더스 문자 10개가 들어있는 간판(看板, signboard)이 발견되었는데 문자 하나의 크기는 30cm 정도이며 이것은 성채 출입문 정면에 걸려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간판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 인더스문자는 5,500년 전부터 사용되었으며 400개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역사서나 비문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고 간판에 쓰인 것도 드문 경우였다.

문자는 주로 인장에 다른 동물상들과 함께 새겨지기도 하고 도기주전자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물건 등 대량생산품에 나타나는데 보통 네 자 내지 다섯 자이나 대부분 매우 작고 정교하며 한 면에 가장 많이 들어간 것은 가로 세로가 각각 2.5cm 미만인 사각형에 17자가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한 물건에 통 털어서 가장 길게 들어간 것도 세 면에 26자가 들어간 것이 고작인데 이들 문자는 아직도 해독이 되지 않고 있다.

인장은 테라코타(terracotta: 점토로 조형한 작품을 그대로 건조시켜 구운 것임), 청동, 동석(凍石, steatite: 비누 같은 감촉이 있어서 비누석(soapstone)이라고도 하는데 청록색 ·백색 ·회록색 ·갈회색 등의 빛깔을 가지며 부드러워 활마재(滑磨材)로 쓰기도 하고 도자기의 원료나 조각 재료 등에도 사용됨. 메소포타미아의 원통형 인장(印章)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사문석이나 운모편암 등에 함유되어 있음) 등으로 만들었는데 보통 사각형이고 뒷면에는 쥐기 좋게 둥근 손잡이가 붙어있으며 화물의 봉인(封印, sealing)용이나 소유자를 밝힐 목적으로 사용되어 용도는 오늘날과 비슷하였다.

그들은 또 비슷한 재료로 해부학적으로도 매우 상세한 작은 상(像, figurine)들을 잘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춤추는 소녀상은 매우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