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탄] 국민의당 38명 국회의원들은 해명해보라

광주 5.18 심복례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다

2016-06-10     특별취재팀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드골은 수많은 언론인을 처형했다. 그러자 언론인들은 왜 자신들은 침묵만 했는데 처형 당하냐고 항의를 했다. 답은 “침묵이 죄다”였다. 드골은 나치란 괴물들이 저지른 불의에 침묵한 언론인에게 그 책임을 사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지금 <뉴스타운>은 대한민국 모든 언론이 손을 놓은 ‘광주 5.18’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이미 수건의 고소·고발은 물론 호외지 발행조차 가로막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이 자신이 대표 발의한 ‘5.18 민주화운동특별법’개정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뉴스타운>발행인과 지만원 박사, 노숙자담요(필명), 김동일 칼럼리스트 등 4인을 형법 및 정보통신망법 상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서울북부지검에 고소했다. 일단 박 의원이 자당 의원 38명의 서명을 받아 개정안을 발의한 이상 지금부터 <뉴스타운>의 물음에 분명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를 밝히지 못하면 박 의원은 물론 자당 의원 38명 모두가 뭐가 왜곡이고, 뭐가 사실인지, 또 뭐가 엉터리인지 모른 채 고소한 것임을 확인 해두고자 한다. <뉴스타운>은 고소·고발 두렵지 않다. 평생을 감옥을 살고, 전재산을 모두 날린다 해도 끝까지 진실을 밝히는데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그 이유는 오로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의 알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다.<편집자주>

북한 이을설 주장했던 심복례의 허구성!

심복례씨는 2015년 9월 22일 광주지방법원 제21민사부(이창한)에 가처분신청을 낼 때, 지만원 박사가 제시한 ‘광수’(북한특수군 지칭)사진 속 리을설(제62광수, 북한의 인민군 원수, 2015년 11월 7일 사망)로 지명된 사람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0월 20일, 심복례씨는 5·18 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등과 함께 지만원 박사를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광주지검에 고소 하면서 주장을 바꾼다. 가처분 때 주장했던 리을설이 아니라 지 박사가 김정일의 첫 부인으로 지목한 홍일천(제139광수)이 자신이라고 주장을 바꾸었다.

먼저 심복례씨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는 리을설도, 홍일천도 아니다. 얼굴 생김새건, 나이건, 입고 있는 옷이건 모든 것을 뒷전으로 두고서라도 심복례씨가 아니라는 것은 수많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알리바이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본인의 진술은 물론이고, 사이버 추모공원, 남편 김인태씨의 사망기록, 5.18 기념재단 안장자 찾기, 사망자 검시확인서 등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됐다.

심복례가 주장하는 리을설, 홍일천이 나오는 사진은 1980년 5월 23일에 촬영된 것이다. 그런데 심복례씨가 광주로 올라온 날은 그보다 8일 이후인 5월 30일 이후다. 어떻게 광주에도 올라오지 않았는데 5월 23일 촬영사진에 자신이 있다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 김인태씨가 시민군에 납치당한 사건 발생 후 상무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신원이 검시관들에 의해 확인된 날짜는 5월 28일이었다. 남편 김인태씨의 주민등록증이 그의 상의 안 주머니에서 이 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심복례씨 역시 본인도 면사무소 직원에게서 남편 김인태씨의 사망통지서가 면사무소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때가 5월 말이라고 증언한다. 즉 5월 28일 부검 때 김인태씨 옷에 들어있던 주민등록증으로 거주지를 찾아, 그 다음날인 29일 망월동 묘역에서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가매장하고, 합동장례식이 끝난 다음에야 광주시가 해남의 심복례씨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한 것이다.

심복례씨는 5월 23일 상무관에서 온 사실이 없다. 이는 심복례씨의 증언록 등이 이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의 증언록에는 “5월 19일 광주를 향해 떠난 남편은 며칠째 소식이 없었다. (심복례 씨는) ‘남자가 바깥 일을 하다보면 으레 이곳저곳 볼일도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염려하지 않았다. 궁금해도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남편에게서는 소식이 없고 일손은 달렸다. 남편이 떠난 지 벌써 열흘이 되자, 점점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일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면사무소에 달려가 보니 분명 김인태씨의 사망을 알리는 종이쪽지였다. 벌써 망월동 묘역에 가매장되어 있으니 와서 시신을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시신의 주머니 안에 있던 주민등록증으로 거주지를 찾았다고 했다.”

합동장례식이 끝난 후에 배달된 남편 사망통지서를 받고 광주에 도착한 심복례씨를 광주시가 안내한 장소 역시 망월동 이었음을 심복례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바로 남편이 있다는 광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교통편이 없었다.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6시, 시누이와 동네 어르신 몇 분과 똑딱선을 빌려 해남을 출발해 목포로 갔고, 목포에서 다시 광주행 버스를 탔다. 도청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모여 있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시에서 내준 버스를 타고 망월동에 도착하니 시신을 넣을 구덩이가 이미 만들어져 있고 관들이 한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런 내용은 사이버추모공간(국립 5.18 민주묘지 1묘역)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사망일자가 1980년 5월 20일로 기록돼 있다. 내용에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남편, (중략) 김인태씨의 큰 아들이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980년 2월에 졸업했으나 하숙비를 해결하지 못해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이 돼서야 그동안 농사일로 바빠 해결하지 못했던 큰 아들의 밀린 하숙비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광주로 향했다. 집을 나선 김인태씨는 열흘이 넘게 소식이 없었다. 심복례씨는 별일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남편을 기다렸다. 5월 말께, 심복례씨는 장을 보기 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면사무소 직원에게 김인태씨의 사망통지서가 면사무소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인태씨가 사망에 이른 경위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는 그가 연행되고 바로 숨을 거뒀는지, 구타에 시달리다가 버려지기 직전에 숨을 거뒀는지 조차 알 수 없다.(중략)(증언자 : 심복례).

이렇듯 심복례씨는 합동장례식이 끝난 후에 배달된 남편 사망통지서를 받고 광주에 도착한데 이어 광주시가 안내한 장소인 망월동을 간 것이다. 이런 심복례씨가 어떻게 23일에 촬영된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두가 속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심복례씨의 팔을 들어준 광주지법 이창환 판사, 김동규 판사, 국민의 당 38명 국회의원,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보도한 언론들은 분명히 여기에 대한 입장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하며 용서를 구해야 한다. 국민의 알권리를 짓밟은 잘못은 법이 심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