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보다는 점차 커지는 초승달형국이 좋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2016-05-18     김호년 선생

옛날 캄캄한 밤에 둥근달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추석의 보름달도 그런 의미의 축제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풍수지리설의 형국론에서는 둥근달(滿月)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日)과 월(月)은 중요시하면서도 월(月)의 경우 초승달형, 즉 반월(半月)형을 선호했다.

반월형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점점 커져서 보름달처럼 재산이 늘어나거나 출세를 한다고 생각했다. 초승달형국에 대한 첫 공식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찿아볼 수 있다.

주인공은 신라 네 번째 왕인 탈해왕과 그 집이다. 그가 무명의 신분이었던 어린 시절 경주 토함산에 올라가 이레 동안 머무르면서 경주성에 명당 집터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초승달형국의 집터가 있음을 발견했다. 산을 내려와 그 형국에 당도해 보니 그 자리에는 이미 집이 있었다. 바로 호공(瓠公)의 소유였다. 그는 이 집을 차지하기 위해 꾀를 냈다. 주인 몰래 숫돌과 숯을 집터에 묻어 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찿아와 옛날 우리 선대의 집이라고 우겼다. 결국 송사가 되어 관가에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증거를 대라는 물음에 탈해는 자기 집안은 본래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시골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집터를 파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왕은 남해(南解)였다. 왕이 이를 알고 슬기 있는 사람이라 여겨 맏공주와 짝을 지어 부마로 삼았다.

남해왕을 이은 아들 궁해왕도 죽자 서기 57년6월 탈해가 신라 4대왕이 되었다. 결국 반월형의 집을 차지했기 때문에 왕이 된 셈이다. 삼국유사는 그가 알에서 나왔다고 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으며 성은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석(昔)씨, 또는 까치(鵲)가 울어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고 석(昔)씨라고 했다고 전해온다.

반월형은 점차 만월로 발전할 소망이 담겨 있는 것으로 성장과 융성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충남 서산군 안면읍에 이런 집터에 살고 있는 박모 씨는 자기 집터가 반월형이어서 한때는 기운이 뻗어갔으나 보름달이 기울 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쇠퇴하였다고 푸념했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