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흉화복, 집터의 생기에서 나온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2016-04-22     김호년 선생

한옥이나 고궁, 옛 사찰에서 보면 우리의 선대들은 집을 짓는데 돌과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집을 건축하는 기술이 그렇게 발달했는데도 선대들은 요즘처럼 왜 아파트 같은 높은 집을 짓지 않았을까?

풍수지리설의 이치 때문이다. 집이란 땅의 생기를 받아야 좋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대지(垈地)가 지기를 누리기에 양호한 곳이면 그 위에 짓는 가옥은 높거나 크거나 작은, 즉 대소장루(大小壯陋)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땅이 주(主)이고 집은 종(從)의 위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려 충렬왕(1275~1308)때 관후서(관후서)에서 임금에게 진언한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는 다산(多山)의 지형이기 때문에 만약 높은 집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하게 된다고 했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따르면 땅을 음양으로 구분할 때 다산(多山)은 양, 희산(稀山)을 음이라 했고, 집은 높은 고루(高樓)를, 평옥(平屋)을 음이라고 보았는데 다산의 땅에 고루를 지으면 양과 양의 상태가 되어 불화를 이루고 고루와 고루가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양에 대해서 음인 평옥을 지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과 양이 조화돼야 생기의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런 풍수사상은 구한말까지만 해도 복거백제(卜居百濟)라 해서 집 한 채 짓는데 백 가지의 제약을 감안해 지었다. 벼슬이 2품 이상 되는 양반은 40칸 이하, 3품 이하는 30칸 이하, 상민은 10칸 이하로 지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왕궁을 내려다 볼 만큼 높은 곳에다 지어서도 안되었다.

이것은 통치상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문을 남으로 내서는 안되며 집터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면 재물은 생기지만 사람이 죽으며,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면, 후손이 없다는 등의 제약은 모두 풍수지리설 양택론에서 나온 것들이다.

더 전문적인 내용으로는 집터의 모대 모양이 끝이 둥글면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끝이 모나면 도둑이 든다고 했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