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화도읍 화광중학교 모체인 배정학교 설립자 ‘논쟁’
H 교회 측, 교회가 설립 ‘주장’ & 이원규 부친 이풍직 설립 ‘주장’
경기도 남양주 화도에서 한 중학교의 설립자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H 교회에서 선교 목적의 각 티슈를 주민들에게 교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표지 양면의 홍보 내용이 H 교회가 화도에 위치한 화광중학교의 모체인 배정학교을 세웠다는 내용에서 발단이 됐다.
사건의 제보 주인공인 이원규씨는 H 교회의 각 티슈를 발견하고 교회 홈페이지를 살펴 보니 사실과 다르다며 부친으로부터 그동안 들어온 사실은 배정학교 인가를 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기독교 단체의 힘이 필요해 목사님을 선생님들로 초빙 교육(교사직)에 참여 하도록 했으나, 당시 기대와 달리 인가가 나질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부친은 위암이라는 병을 얻어 힘들겠다고 판단하셔서 국가에 헌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씨는 H 교회가 주장하는 목사님들의 참여 까지는 인정하지만 설립은 고인인 부친 이풍직(화도면장역임)이 설립자가 맞다. 그런데 교육과 계몽에 앞장서 헌신 하신 분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고 교회가 설립자인 부친을 배재해 홍보한 것에 대해서도 화가나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H 교회의 홈페이지의 내용 중,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 이원규씨의 주장을 비교해도 이 씨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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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홈페이지 소개 내용) 1901년 무스 선교사님에 의하여 월산리 답내리 마을에 달뫼(보통 사람들은 달뫼를 당미라고 발음하였습니다)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의 답내 초등학교 정문 맞은 편은 붉은 진흙 언덕이었기에, 사람들이 붉은 언덕이라고 불렀으며 이 씨네 땅이었습니다. 이 씨네서 기꺼이 땅을 내어 주어 이곳에 한옥으로 교회당에 세워 졌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보자 이원규씨는 교회에 토지를 희사 했다는 이 씨는 화도 면장을 지낸 자신의 부친 (고)이풍직이라고 밝혔다.
(교회 소개 내용) 교회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배인학당이 세워졌고, 배인학당에서는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습니다. 배인학당은 6.25 사변 후에 배정학교가 되고, 배정학교는 후에 공립 화광중학교가 되었습니다. 화광중학교 연역에 1907년 화광중학교의 모태인 배인학당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산교회는 이 기록을 근거로 1907년을 교회 창립년도를 잡았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이인하 영수 댁에 머물렀다면 교회 창립년도가 1899년이고 무스 선교사가 머물렀다면 교회 창립년도가 1901년일 것입니다.
이 부분도 이원규씨(주장)에 주장에 따르면, 1945년 화도 면장으로 근무하시던 부친 이풍직은 월산리 99와 99-1번지 24,000평이 적산 땅이라는 것을 아시고 이곳에 중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셔 당시 상공부 장관을 지낸 강성태씨를 만나 불하 받게 해달라는 청원을 해서 불하를 받았다고 했다.
이후 부친은 학교 부지의 토목공사를 완료하고 학교를 건축하려 할 때 6.25 사변이 발발해 건축하지 못하고 1.4 후퇴를 맞아 충청북도로 피난하여 도 사회과에 근무했다.
(교회 소개 내용)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교회당이 불에 타게 됩니다. 지현리 공회당을 임시 예배 처소로 정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1951년 미 77탱크부대에서 일본 사람의 소유였던 적산 땅에 교회당과 학교를 건축하여 주었습니다.
배정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중위로 근무하던 레이턴이란 분이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저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정학교를 운영하였지만 재정적으로 운영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교회는 고심 끝에 학교를 문교부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공립 화광중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원규씨 주장) 부친은 근무 중 정부에서는 학교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을 시는 미국의 원조로 학교를 지을 수 있다는 공문을 접해 그날 즉시 사표를 내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중학생 120명을 모집 화도읍 월산리 395-9번지에 공회당을 교실로 하여 1.2학년이 공부하고 345번지 자택 안채에 4칸 마루에서 3학년을 가르치니 미군들이 나와 확인하고 구호물자와 더불어 목재로 교실 5개를 지어주었습니다.
당시 학교 재정은 어려운 상황이었고 정식인가 아닌 고등공민학교로 수년간 운영 중 학교설립자인 부친은 59세에 위암을 선고 받아 더 이상 학교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가에 헌납하시고 68년 1월 3일 소천 하셨습니다.
이후 고인 된 부친은 1968년 화광중학교로 공립인가를 보지 못하시고 돌아 가셔서 교육에 헌신과 열정을 다하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저희 가족 모두와 지인들은 슬픔에 잠겼었습니다.
(교회) 학교를 문교부에 기증하고 나니 학교 마당에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4년에 지금의 화도휴게소 윗 편에 400여 평을 구입하여 교회당을 지어 이전하였습니다. 1985년에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고 자립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여 주일에 교우들끼리 예배를 드린 적도 많았습니다.
이 부분도 이원규씨(주장)는 교회당을 학교의 배정학교학생들이 사용하게 하기위해 화도휴게소 위편의 토지(약400평)도 부친이 매입해 교회에 무상으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희사했습니다. 지금의 H 교회는 이 땅(약400평)을 화도휴게소에 처분해 현재 교회 부지인 80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씨는 입증근거로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이풍직 송덕비가 마을 입구에 있음을 확인해 주었고 화광중학교 교정에 이풍직, 강성태, 송덕비가 있음도 확인할 수가 있어 이 씨의 주장이 사실일 것이라는데 무게가 더 실렸다.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이원규씨는 부친 이풍직의 3남 4녀중 장남으로 1939년(현재 78세)에 출생, 담내초등학교와 배정중학교, 대동상고, 동국대 농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지방공무원으로 수동부면장과 화도면, 진접면을 거쳐 오남출장소에서 퇴임했으며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편, H 교회 관계자는 “자세한 것은 부임 한지 2년 되었고 학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들은 이야기를 홈페이지 등에 올렸다” 고 말했다.
취재 결과 H 교회와 설립자의 아들 이원규씨는 상호 절충점을 찾아 가문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간 충돌이 없도록 사실을 전제해 협의하고 두 역사가 하나가 되도록 정립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