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앞 상석은 제상 아닌 ‘혼유석’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2016-03-02     김호년 선생

명절이 다가오면 타향에 사는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도 만나고 성묘도 한다. 고향에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조상의 묘소에 사초(沙草)할 일도 걱정이 돼 마음이 바쁘다.

이렇게 많이 쓰이는 ‘성묘’와 ‘사초’, ‘사토’ 등의 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흔히들 ‘성묘’라고 하면 산소에 가서 절하는 것을 뜻하고, ‘사초’라고 하면 무덤 위의 풀을 베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궁중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임금이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낸 뒤 묘소를 살펴보는 것을 성묘라 했고 묘에 난 풀을 사초라고 했으며 사초의 흙을 사토라고 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초는 방동사니과에 속하는 골사초, 두메사초 등의 총칭, 또는 사초과에 달린 다년생풀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잔디라는 뜻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왕릉 밑에 제사 지내는 집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하는 까닭은 중국과의 관계를 들춰내는 것이라 개운치 않다. 제각의 모양이 한문의 정(丁)자로 지었는가? 제사를 지내기에 알맞다는 등 기능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보았을 때 정남(正南)에서 서쪽으로 약간 나간 풍수지리 패철(지남철)상의 정(丁)자 방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황제이고 조선은 한 급 아래인 왕이기 때문에 정자각이 되었고 중국 황제들의 무덤에 세운 제각은 모두 하늘을 뜻하는 일(日)자각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승격시킨 고종황제의 금곡릉만은 정자각이 아닌 일(日)자각의 침천으로 만들었다. 명실공이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된 왕릉이 된 셈이다.

왕릉의 제사인 경우 이 제각에서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린다. 그렇다면 무덤 앞의 상석은 무엇인가. 왕릉의 경우 이 상석을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무덤의 혼이 나와서 이 돌 위에서 논다는 뜻이다. 이 상석에는 재물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민가의 상석에는 앞뒤에 계단 같은 돌을 놓아 왕릉의 혼유석과는 다르다. 상석 앞쪽 계단에는 촛불이나 항을 놓고 피우게 되며, 뒷계단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나와 앉아 상석에 차린 음식을 먹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가끔 TV의 사극 가운데 왕릉의 혼유석에 제물을 놓고 여인이 넋두리하는 웃지 못할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