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명당의 주인은 누구?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2016-01-22     김호년 선생

명당에는 명당임을 강조하는 신비성이 가미된 에피소드가 많다. 노사신의 지석(誌石) 일화도 그 중의 하나지만 천하명당이라는 영릉(세종대왕릉)도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영릉은 광주(廣州) 이씨의 선산을 빼앗은 곳이어서 풍수지리적인 흥미는 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사실과는 다르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주 인근의 노인들에게 전설처럼 이씨 가문의 묘가 권씨네로, 그것도 이미 쓴 묘가 아니라 이제 막 이장하려는 순간에 빼앗겨왔다고 와전시킨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유포가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조 실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영릉의 자리는 원래 광주 이씨 3대조인 이인손(李仁孫)의 묘소이다. 이인손은 태종때 문과에 급제, 우의정에 이르렀던 인물, 그의 아버지는 청백리로 유명한 이지직(李之直)이요, 구우ㅏ 헐어보자 또한 고려말에 절의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집(李潗)이다. 그의 묘소는 경북 영천 칙고개에 있는데 후손에 문장가가 나온다는 야자(也字)형국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정승(이인손)이 나왔다고도 전해지는데 이인손 또한 명당에 묻혔다.

세종의 능자리를 잡으러 다니던 일행이 이인손의 묘를 보고 돌아와 예종에 복명하기를 “천하명당이 있기는 하오나 이미...” 이인손이 묻혀있다고 아뢰었다. 예종은 그 후로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이인손의 장남 이극배를 불러 차마 묘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은 못하고 애원 비슷하게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 그토록 좋은 명당을 잡아 아버지를 모셨느뇨, 나는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나 할아버지의 능침을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이 부럽기만 하오”라고 심중을 토로했다.

왕이 여러 차례 같은 말을 거듭하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결국 내주게 되었다. 후손들이 묘를 파자 속에서 비기(泌記)가 나왔다. 비기대로 연(鳶)을 띄워서 떨어진 곳에 이장했는데 그곳 마을 이름은 연줄의 음을 따서 연줄리(신지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더러는 신라말 도선(逃詵)의 비기가 나왔다고도 하는데 ‘단족대왕 영폄지지(短足大王 永窆地支)’k고 쓰여 있다고 한다. 원래 세종대왕은 다리가 하나 짧아 별명이 단족대왕이었다. 어쨌든 이 같은 명당에 세종이 모셔져 조선왕주가 백년은 더 집권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광주 이씨가 하도 번성하므로 기를 꺾으려는 계산된 음모로 묘 자리를 빼앗았다는 반대설도 전해진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