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시대부터 시작된 ‘뼈’ 숭배사상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2016-01-04     김호년 선생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지기의 영향을 받는다는 시신의 뼈를 중요시했을까.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어도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승 살이를 계속 한다고 믿어왔다. 신라시대 행해졌던 순장 풍속이 바로 이런 계생(繼生) 관념을 말해 준다.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은 죽지만 저 세상으로 가서 다시 태어나 계속 다른 삶을 영위한다고 믿었기에 평소에 쓰던 생활용구는 물론 아내와 하인들까지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생겨났다.

이런 계생 관념은 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재생의 근본이자 근거는 바로 뼈라고 생각한 것이다. 요즈음에도 ‘뼈대 있는 집안’을 들먹이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상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뼈를 중요시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사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지석묘(支石墓), 고인돌의 경우도 뼈를 묻어둔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 고인돌을 발굴 조사했을 때 뼈가 묻혀 있는 석실(石室)이 작아서 어린이 무덤이라고 추정했었다.

그러나 그 속의 뼈가 더러는 성인의 것도 있고 또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러 구의 유골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묻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육탈시킨 뒤 뼈만을 이곳에 다시 묻은 것으로 확인 된 것이다. 그래서 고인돌 무덤은 부부 또는 가까운 혈연관계 집단의 공동묘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초분(草墳)이라는 장법(葬法)도 뼈를 숭상하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어진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초분에서 육탈을 시킨 뒤 뼈만을 다시 묻는 것이다. 이때 처음 초분은 가장(假葬)이라 하고 뒤에 제대로 묻는 것을 본장(本葬)이라고 한다.

백제 무녕왕릉의 경우가 바로 그 예다. 지석(誌石)에 따르면 죽은 날짜와 무덤을 쓴 날짜 사이가 만 2년 3개월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로 미루어 초분을 거쳐 본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도 이와 유사하다. 기록에 따르면 사망한 해는 서기 412년인데 산에 묻은 것은 서기 414년으로 되어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2년 동안을 육탈 기간으로 추정한다. 풍수지리설의 근본정신 중의 하나는 땅에 영기(靈氣)를 받은 것은 육탈된 뼈뿐이라고 믿는 것이다. 묘를 쓴 지 3,4년 내에 꼭 이장하는 풍속이 얼마 전까지 행해져 온 것도 바로 시신의 육탈과정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