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한이 맺힌 중국 선양(瀋陽)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의미를 체험
‘아아, 우리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수 많은 선조들이 이국땅에 끌려와 갖은 핍박과 고초, 능욕을 당했던 곳이구나!’
인천공항에서 서해 하늘길로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중국 선양(瀋陽)땅에 도착해 ‘선양고궁(瀋陽故宮)’의 드넓은 대정전(大政殿) 계단에 서니 380년 전 병자호란을 당하여 조선 백성 60여만 명이 이곳에 인질로 잡혀와 핍박은 물론 노예로 살아야 했던 슬픈 역사를 생각하며 전율과 함께 장탄식(長歎息)이 절로 났다.
선양은 류탸오볜(柳條邊:'버드나무 울타리'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도 했는데, 여진족인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을 일으켜 2대 홍타이(태종)가 북경 공락으로 청(淸)나라로 칭하며 수도를 옮기기까지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한이 맺힌 땅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 명(明),청(淸) 권력 교체기에 광해군(光海君,1575~1641)이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통해 실리를 취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능양군 인조(仁祖,1595~1649)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는 다스린다.)으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고수하여 후금과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후금의 침략 구실 밀미가 되었고, 결국 정묘호란(인조 5년,1627)과 병자호란을 겪게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1627년(仁祖 5년) 정묘호란으로 강화도까지 파천했던 조선 조정은 9년뒤인 1636년(仁祖 14년) 12월 2일 홍타이가 이끄는 10만 대군이 파죽지세로 조선땅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12월 14일 파천에 나서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孝宗)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는 강화도로, 왕과 대신들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항전했으나, 견디지 못하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인조는 홍타이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절)’와 ‘대청황제공덕비’까지 세우는 치욕을 당했다.
패전의 쓰라린 결과는 소현세자(昭顯世子) 부부, 봉림대군(鳳林大君), 척화파 김상헌, 주화파 최명길,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로 불리는 홍익환, 윤집, 오달제와 중신을 비롯해 60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인질이 되어 머나 먼 선양땅에서 핍박과 능욕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선양고궁을 나와 승용차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를 동북쪽으로 3시간 30여분 동안 쉬지 않고 달려 단동(丹東) 인근에 이르자 그제야 산과 계곡들이 보이기 시작해 압록강에서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길에서 그 옛날 북녘의 한겨울 추위에 한양에서부터 인질로 잡혀 끌려가면서 병사(病死)하거나 동사(凍死) 또는 아사(餓死者)가 부지기수였을 것이며, 변변치 못한 행장(行裝)에 청군의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몇날 며칠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며 걸어갔을 선조들의 발걸음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죽음을 무릅쓰고 도착한 선양땅에서는 거의 대다수가 노예로 팔려 나가는 비운을 겪는 등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기도 했으며, 돈을 주고 환속하는 여인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는데, 조국에 돌아 와서도 부모와 지아비, 자식들에게도 천대를 받아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슬픈 사연들이 있으며, ‘화양년’ 이란 비속어를 낳기도 했고, 이들이 낳은 자식들을 ‘호로자식-후례자식’이라고 비아냥하는 말도 생겨나기도 했으니, 백성들에게 전쟁의 후유증과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지난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여진족에 의한 두 번의 호란을 겪기 전에도 율곡 이이(李珥)는 상소문을 통해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극이 달하여 ‘조선은 고칠 수 없는 썩은 집’ 이라고 까지 비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하다 선조(宣祖,1552~1608)25년 1592년에는 왜군들이 강토를 유린하자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파천하는 등 7년간의 임진왜란과 이어진 2년동안 정유재란으로 수 많은 백성들이 처참히 죽거나 인질로 잡혀갔던 쓰라린 국난(國難)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변모하는 대륙의 판도를 읽기는커녕 사대(事大)와 국력을 키우지 않는 나태로 인하여 또다시 이민족의 칩입으로 위기를 자초했었다.
또한 한말(韓末)에도 임금과 조정이 국제정세는 아랑곳하지 않아 36년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다 결국에는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간의 전쟁과 오늘날까지 분단이 지속되는 굴곡되고 안타까운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굴곡진 역사를 갖게 된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습왕조를 이어 오면서 그들만의 절대권력으로 백성의 임금이 아니라 신하와 종친, 나인들의 임금으로 살았으며,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그 궁궐의 울타리에서 자라 백성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 민유방본(民惟邦本: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은 겉치레에 불과한 ‘그들끼리의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만이 갖은 부역과 관리들의 횡포에 이용당하기도 모자라 이들 이민족들의 칩입으로 숱한 목숨을 내놓거나, 핍박과 능욕을 당했으며, 현재까지 계속되는 북한의 세습독재 권력의 시달림과 배고품을 못이겨 탈북하거나 중국에 인신매매로 팔려가 고초를 당하는 수 많은 동포들의 슬픈 역사가 현재진행형이다.
그 옛날 중국땅에서 밟히고 쓰러져간 선조들과 지금도 중국땅에서 떠돌고 있는 탈북자나 노예같은 삶을 살아가는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김구)’,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신채호)’는 의미를 현장에서 온몸으로 체험하는 값진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