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원적 나라 대한민국

한국의 지식제일주의는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킨 것이라 하겠다

2015-04-02     하봉규 논설위원(부경대 교수)

청소년기 읽었던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 요즘 떠나지 않는다. 이책은 전후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기술합리성에 빠져버린 서구의 정신문화를 비판한 것이었다. 일차원이란 점과 같이 메가트렌드에 무비판적 지성인들에 대한 통렬한 자성을 촉구한 것이었다.

이 책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오늘의 한국 지성에 대한 본질적 의구심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지성에 대한 생각이나 위기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필자가 상아탑(대학)에 자리잡은지 20년이 넘었으나 줄곧 대학 교육과 지성이 해체되는 연속이라 지성인의 불행한 시대라고 말해왔다. 문제는 한국의 대표적 대학이라는 SKY나 지성의 상징이라할 수 있는 학술원의 자세였다.

주지하다시피 군사독재 당시에 대학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인권에 대한 구제와 함께 국가발전을 위한 지적 축적을 위한 보루였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엔 당연하게도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지도자를 키우는 전당이 되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미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교양과 지식, 권리와 책임, 도덕성과 리더십을 키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명문대학들은 권위에 안주하고 인재들을 독점하고 지성의 책임엔 등한시 하였다. 상아탑의 개념은 스스로 사회와 격리되어 사회를 진단하고 방안을 제시하는 방향타로서 정의될 수 있다. 진리의 신을 섬기기에 다양한 전공과 방법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university인 것이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학은 대기업, 교회, 시민단체 등과 함께 자율조정기구인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성의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는 이 개념이 갖는 도덕적 바탕과 함께하는 지식의 결합에 대한 포기였다. 한국은 50년전 조국근대화를 시작한 이래 가장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으나 군인과 기업인이 주축이 됨으로써 교양, 문화, 도덕(윤리) 등 지성의 한 축은 취약했었다. 단지 유교적 전통과 전쟁, 빈곤 등으로 조심성과 예절로서 어느정도 바탕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함께한 자신감은 오히려 이러한 기반을 약화시켰다. 소위 모든 것을 경제적 합리성으로 보는 졸부문화가 확산된 것이다. 한때 전후 일본인은 경제동물로 불리웠으나, 199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통령들도 외교에서 돈과 기술을 자랑하는 거들먹거림으로 국제외교가의 졸부행태로 비난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민주화 30년을 앞두고 있다. 이미 민주화 10년만에 IMF를 경험하였고, 이후 장기적 침체경제를 겪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한국은 경제중심적 사고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중요하지만 보이는 분야이고 제한적 분야이다. 무엇보다 경제도 사회, 정치, 문화 등 여러 분야와 유기적 연관성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경제분야의 주도적 연구에서도 경제를 결정하는 요소의 과반은 비경제적 요인으로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어 왔다.

한국 사회의 저차원성은 지적 세계에서 두드러진다. 지식은 크게 보아 4차원으로 구분된다. 즉, 1차원적 지식인 상식(common sense), 2차원적 지식인 과학(science), 3차원적 지식인 양식(good sense), 그리고 4차원적 지식인 영성(spirituality)로 나누어 진다. 물론 현대 기술합리성을 대표하는 과학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으며 실제로 2-3년 단위로 배증하며 이것은 세계시장 규모와 일치된다고 한다.

하지만 과학의 힘에도 불구하고 왜 과학은 2차원에 머무는가에 대한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 과학은 자체가 도덕과 윤리와 같은 가치관이란 인간 본연의 문제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다. 즉 지식의 대명사인 과학은 인류의 경헝과 지혜의 보고인 양식을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도덕과 지식의 결합(combination)인 동시에 지식간의 교류(소통)인 지성(intellectuality)은 전정한 목표이며 방향인 것이다.

지식의 단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지식제일주의는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킨 것이라 하겠다. 출세, 성공, 경쟁을 하기 위해 교육을 가치관, 도덕, 윤리 등과 철저히 유리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엘리트들은 국제사회의 미아와 같아졌다. 외국의 엘리트들은 독서와 종교적 소양 등으로 끝없는 대화거리가 넘치지만 오직 제한된 지식의 세계에 갇힌 것이다.

서구인들의 자신감은 단순히 역사나 인종 등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 신사도와 교양(양식)에서 찾아진다. 유럽 각국의 국기에는 중세를 대체한 근대사가 투영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지적 혁명도 포함된다.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근대사회는 지적 혁명을 독서국가에서 찾았다. 이제 "인생은 동화에서 러시아 소설 까지"란 말을 일반화하고 있다. 일반 사회생활에서 독서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서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오늘 한국인의 손에는 책대신 핸드폰이 있다. 상아탑에 있는 필자는 한국 사회의 여러 천박함을 열거조차 힘든 실정이다. 예컨대 지성을 자처하는 교수들도 태반이 음주를 상습적으로 마시고 아무런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상태로 라면 한국이 세계 선도국이 되는 일은 영원히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