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의 한국은 간첩이 침투할 수 없는 밀봉상태였는가?

2014-09-14     지만원 박사

1979-80의 언론보도집에 의하면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검거된 무장간첩 단은 7건이었다.

1) 1980.3.17.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3.23.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 3명의 무장공비 사살. 소음기가 달린 권총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3.25.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 무장간첩 8명 사망.

4) 1980.3.27.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 교전 후 도주, 무장공비 1명 사살

5) 1980.5.12.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교전

6) 1980.5.15.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국과 교전

7) 1980.5.16.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1명 체포(이창룡), 환각제 다량 보유

남침관련첩보 입수

1979년 12월, 1980년 초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미국으로부터 입수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년 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했다(1979.12.25자.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괴대남도발 위협판단”).

이 것 말고도 남침 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1980.5.10.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를 입수했다. 남침 시기는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시기와 맞물려 있다. 김재규 처형에 따른 항의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15-5.20 아시에 남침을 하기로 재결정하였다. 이 첩보는 중국 당국이 일본 방위청에 제보한 것이었다.(1980.5.10. 육군본부작성 “북괴 남침설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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