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최종보고서(요약)

2014-09-12     지만원 박사

5.18 당시 광주에는 오직 하나의 시위대만 존재했다. 10.26 이후 축차 침투한 살인기계 북한특수군 600명이다. 광주에서는 이들을 연고대생 600명이라 불렀다.

살벌했던 5.17 계엄이 선포되면서 광주의 운동권과 대학생들은 잡혀갔거나 “비겁하게도” 사태기간 내내 숨어있었다.

생각 없는 10대와 넝마주이, 껌팔이, 철공 등 59개 직종의 개념 없는 사회불만 계급이 부나비 되어 소모품 노릇을 했다.

600명은 4시간 만에 44개 무기고를 털어 광주군과 계엄군간의 전쟁을 유도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광주교도소를 점령해 수용자들을 이용하려다가 또 실패해, 26일 밤 안개처럼 사라졌다.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형을 받은 12명의 대부분은 겨우 5월 26일 하루 동안 ‘결사항전’을 선포해 계엄군 작전을 불러들인 죗값을 치른 ‘무개념 부나비들’이었다.

이 ‘600명의 북한군’을 놓고 1997년 대법원은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라 했고,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조기에 진압한 전두환 등을 내란범이라 판시했다.

1981년의 대법원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600명이 저지른 가공스런 살인-파괴 행위에 대해 처벌할 자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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