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최중호 선생 선정

독립기념관, 7월 한 달간 야외 특별전시장서 자료 전시

2014-06-30     김철진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광복회(회장 박유철)와 공동으로 최중호 선생을 2014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최중호 선생은 1891년 1월20일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한편,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등 민족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하고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소위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음모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진도에 유배됐다.

1914년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한 선생은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과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선생은 김구(金九) 선생의 주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했으며,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선생은 상하이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돼 교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으며, 교민단에서 운영하던 인성학교의 교사 및 학감으로 인재양성에 주력하며,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등의 단체에 참여해 재정난에 빠진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20년대 후반 독립운동의 통일적 추진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한국유일당상하이촉성회(韓國唯一黨上海促成會)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적극 참여했다.

이후 좌우세력의 인식 차이와 당시 중국 국공분열의 영향으로 해체되고 재상하이한국독립운동자동맹(在上海韓國獨立運動者同盟)이 조직되자 선생은 조직부장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이념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선생은 일경에 체포 당시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악화되어 1934년 3월28일 영면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최중호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7월 한 달 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최중호 선생 자료 15점을 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