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하지만 우아하게 산다

때늦은 도전이지만 행복 했다

2014-06-28     배이제 논설위원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를 아버지 몰래 끌고 나와 안장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얹어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짧닥막한 두 다리를 세로로 끼워 넣고서야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열 살 즈음 일이니까 60년도 더 된 얘기다.

너나없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느 집의 자전거 소유여부로 빈부격차가 가늠되던 시절 아니던가. 두 바퀴를 가누지 못해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보름째, 드디어 균형을 잡고 2, 30미터를 비틀거리며 직진한 능력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무릎은 깨지고 촛대뼈도 까져 캄캄해져서야 절뚝거리며 대문을 들어선 나를 보고는 엄마는 기겁했고 없어진 자전거로 30리길의 관청 일을 보지못한 아버지는 회초리로 벼르고 게셨지만 나의 "드디어 해냈구나!"는 는 거의 희열에 가까왔다.

60년이 흐른 오늘 MTB(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로드로 나가 초등생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고 시도도 못했던 '두 손 겨드랑이에 넣고 페달밟기'에 감히 도전한 것이다. 실은 며칠 전 앞서 달리던 학생아이의 흉내를 해본 짓이다.

맨첨에는 왼 손을 핸들에서 떼고 하다 서서히 양 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는데, 어라? 괜히 마음이 후들거린다. 속사정이 이러하니 몸이 말을 들어줄 리가 만무! 암장 위 허리춤께가 흔들려서 균형잡기가 어렵더니 상체가 오른쪽으로 쏠리고 왼쪽으로 지그제그였다. 10미터를 가다가 그만 논두렁으로 굴렀다.

툴툴털고 일어섰다. 휴~ 시멘트바닥이 아니어서... 했는데 20m를 달린 2차전은 진짜시멘트에 헤딩했다. 다행히 헤드기어 착용으로 면상은 온전했다. 20여분 뒤 30m 직진한 3차전에서는 잡지않은 핸들이 90도로 꺾이는 통에 전신 안장이탈로 길바닥에 나둥그러졌다. 옆을 지나던 바이크가 부축해주면서 "아이구 어르신 조심하셔야지요.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 도로 한켠으로 비껴 앉아 낙법쳐 퉁퉁부은 손바닥을 살펴 보았다.

바이크들이 힐끗거리며 지나간다. 걱정 반, 망령 반의 눈치를 준다. 애들 말로 참 쪽 팔린다. 10여분을 멍때리고 있으려니 희한하게도 오늘 새벽 '홍명보의 월드컵 스코어'가 떠올랐다. "야이 바보병신아 저 아이들은 1만m를 양 손없이도 달려가는데 너는 고작 100m도 못가고 자빠지냐 그래! 꼴 좋다."

오냐 마지막 도전이다! 4차전은 완전오기로 감행했다. 시간은 오후 6시, 집 나온지 벌써 4시간이다. "오늘 양 손 묶고 100m를 달리지 못하면 낙동강 오리알 되고 말자"고 결심.

여태껒의 시행착오를 복기하면서 조심조심, 과감하게 또는 용기있게 도전을 열심히 거듭했다. 세상 모든 것 망각하고 오로지 집중집중하면서 아마 두어시간을 써커스 했을꺼라. 어이쿠나. 그 년인지 그 놈인지가 온거다. 아니 그 분이 오신게지. 100을 달리나 싶더니 200m 300도 거뜬이다. 나중에는 팔달교서 침산교까지 3km를 양 손없이 오토바이 했으니 말이다. 아마 칠십노인의 '양 손없이 자전거 타기' 기네스 기록감이 아닐까 존심조차 생긴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써커스의 완성이자 가당찮은 도전의 완벽한 성공이다.

아버지의 두 발 자전거타기 도전이후, 60년만에 양손없이 페달밟기의 또 다른 도전에도 성공했으니 어찌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시내로 들어와 아주 값싼 중국집에서 볶은 밥 한그릇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