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과 켈로 부대의 피눈물

NLL은 남쪽을 향한 바다에 그어진 민통선이다

2013-07-13     안봉규 논설위원

압록강과 두만강의 두 물줄기에 백두산, 함경도에 칠보산, 평안도에 묘향산, 강원도에 금강산, 황해도에 구월산이 솟아있다. 이 목록은 북한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는 명산들이다. 그중 구월산은 좌파적 민중소설로 유명한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의적 반란군의 주 활동무대로 소개되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받는 곳이다.

구월산(九月山 954m)의 본명은 궐산(闕山)이다. 그곳에 단군의 궁궐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BC 238년 9월 9일 으뜸되는 사황봉(思皇峰)에서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산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전한다. 말하자면, 구월산은 천제(天帝)께서 살아생전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던 관문(Gateway)이었던 것이다.

수월천(水月川)은 구월산 북록에서 내려와 은율 마을을 흠뻑 적시고 황해에 이른다. 1898년 그 개울의 시점에 은율읍교회가 세워졌는데, 예배당은 남녀 출입구가 직각인 기역자(ㄱ) 모양의 한옥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김일성 주석의 부친 김형직(1894~1926)의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물론 날조된 독립운동 유적지이지만, 북한 주민이 단체로 찾아와 교육받는 곳이다.

황해도는 구 왕조의 개경(開京)이 있던 홀대 지방으로 반골정신이 뿌리 깊은 지역이었다. 1884년 중앙에서 갑오경장이 터졌을 때 이곳은 보부상에 의하여 첫 개신교회가 발생했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외래문화에 열려있었다. 김구, 안창호, 이승만 등의 민족주의 지도자가 황해도 출신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친소 괴뢰정부가 38선 이북을 장악했을 때 구월산 주변은 자연스레 반공투사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1950년 6.25동란이 터졌을 때 구월산은 반공 게릴라의 아지트였다. 그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병사들이었지만, 자유를 그리워하는 숭고한 애국지사였다. 그런데 9.15인천상륙작전 이후 황해도는 몇 달 동안 좌우 정치권력이 반전되었다. 그때 미처 탈주 못한 잔류 인민군은 시내에서 구월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1년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1,4후퇴 할 때 구월산의 패잔병들은 다시 은율시내를 장악했다.

황해도 서쪽 바다 38선 부근에는 백령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북쪽으로 장산곶을 뛰어넘으면 초도(椒島)와 석도가 떠있다. 은율 시내에서 쫓긴 반공유격대원들은 초도에서 집결하여 재정비하며 고향수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켈로(KLO)는 당시 미극동사령부의 주한첩보연락처(Korea Liaison Office)이다. 그때 서해지구 켈로 사령부는 백령도에 기지를 둔 “레오파드(Leopard)부대”였는데, 켈로는 초도에 집결된 이들 민간인 병력을 8240부대, 또는 “동키(Donkey)부대”라고 통칭했다. 그러면서 지원과 함께 지휘를 겸했다.

1953년 7.27휴전협정 조인을 얼마 앞두고 초도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갈레의 동키부대들은 38선 이남으로 철수명령을 사령부로부터 받았다. 북진통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켈로 대원들은 청청벽력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으나, 미군의 입장에서 휴전 이후 이런 첩보나 후방교란용 부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괄호 밖의 병력이었고, 얼굴 없는 병사들이었다.

휴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지만, 구월산 영웅들의 찬밥 신세도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인류의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건만, 정전은 그들에게 보상은커녕 명예마저 지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초도에서 대청도로, 다시 안면도로 갔다가 휴전소식을 접하고, 이후 용유도로 이동했다가 국군 8250부대로 편성되면서 겨우 군번을 받아 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었다.

돌이켜보면, 휴전하면서 초도를 비워줄 이유가 없었다. 육상처럼 정전 당시 섬의 실유점령 개념으로 군사분계선을 해상까지 적용했다면 오늘날 바다의 경계선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서해바다는 평안북도 가까이 올라가고, 동해바다는 원산 앞바다까지 바짝 다가갔을 것이다. 바다에 그어진 북방한계선 NLL은 실은, 남쪽을 향한 민통선 용도이었던 것이다.

휴전 당시의 상황에서 NLL은 북쪽에서는 정전에 대한 선물로 보상 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도에서 죽음까지 불사했던 자유의 투사들은 졸지에 실향민으로 전락되었고, 그들은 땅을 치며 목 놓아 울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