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쩨스와 쑹메이링 부부의 젊은 시절 ⓒ AP^^^ | ||
중국에서 한 때 가장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국 역사에서 격랑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장쩨스(장개석)대만 전 총통의 미망인 쑹메이링(宋美齡)여사가 23일(우리시간) 뉴욕 맨하탄 자기 아파트 집에서 106세의 일기로 타계했다고 <로이터통신>이 타이베이 발로 24일 보도했다.
중국 광동성 재벌인 송씨가(宋氏家)의 3자매 중 막내로 태어나고 미모(美貌)와 강철같은 의지(意志)를 소유하기로 유명한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랑의 세월을 보낸 인물이다.
쑹메이링 여사는 1975년 남편 장제스 사망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타이완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고,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했었다. 이후 타이베이에서 살다가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미국의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1927년 장쩨스(蔣介石)와 결혼한 후 남편 장쩨스의 통역으로 활약하면서 대미관계 조정에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국민정부 입법위원, 항공위원회 위원, 비서장, 부녀협회 실생활운동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폭넓은 활약상을 보여줬고, 재산 늘리는 재주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936년 시안(西安)사건 때는 강경파의 의견을 제지하며, 시안으로 들어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단독면담을 한 끝에 장쩨스를 석방시키는 역량을 과시하기도 하고, 항일전(抗日戰)과 공산당과의 내전 중에는 상이군경의 간호, 난민대책 등을 지휘하는 한편, 1942년 미국 각지를 돌며 지원강화를 호소하기도 하면서 국제적인 이물로 부상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당시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이 참석한 카이로회담에 남편을 수행하면서 회담에 간섭하기도 했다. "만일 귀하가 나의 (회의)참석을 허용한다면, 나는 내 남편 장쩨스 생각을 귀하 앞에서 진솔하게 떨어 놓겠다"는 등의 발언을 해 참석자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마지막 2가지 성명을 발표했는데 하나는 1989년 친 민주주의 시위대를 인민군들이 탱크를 몰고와 진압했던 베이징 천안문 사태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외국인들이 약탈해간 중국의 예술품들을 중국으로 되돌려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지금까지 그녀의 나이에 대해 혼선을 빚어 왔다. 미국 웨슬리 대학 학적부에는 1897년 6월5일생으로 기재 됐으나, 이번 그녀의 사망을 계기로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녀의 출생일은 1898년 2월12일 생이라고 발표했다.
쑹메이링 여사의 사망 소식에 대만의 천슈이벤 총통은 성명을 내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조의를 표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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