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대와 친구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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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의 독서 이야기] 하드보일드 하드 럭

^^^▲ <하드보일드...>의 표지
ⓒ 민음사^^^
첫 장을 넘기자마자 마주 대하는 앙증맞은 어린 소녀의 얼굴, 돌연한 눈동자의 시선은 사람을 당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요즘 일본에서 잘 나간다는, 아니 우리 한국 땅에도 하루끼만큼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작가, 바나나. 그녀의 특별한 이름만큼이나 특별한 제목의 소설인 <하드보일드 하드럭>.

그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 알고 펼쳐든 책장의 앞머리. 묘한 이 소녀의 눈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제목이 맘에 들고 이 소녀의 예리한 시선 또한 범상치 않다. 책의 두께로 보아 한나절도 걸리지 않을 분량이다. 자, 이제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으로 떠나볼까?

말했다시피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은 두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자는 한때 동성애를 느껴온 친구의 죽음을, 후자인 '하드럭'은 언니의 과로사를, 이렇게 둘 다 돌연한 죽음을 맞아 남아 있는 자의 애틋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 '하드보일드'

순정만화 같은 '하드 보일드'. 죽음을 말하면서도 전혀 무겁지 않다.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음의 인용문처럼 아름답고 무엇보다 손에 잡힐 듯 감각적이다.

"모퉁이를 돌자. 어깨에서 불길한 느낌이 쓰윽 빠져나가고, 다시금 고적한 밤의 기운이 나를 감쌌다. 밤이 쿡, 장막을 내려뜨리고, 사방은 상쾌하고 맑은 공기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 알록달록 단풍진 낙엽이 이쪽으로 휘날리고, 아름다운 꿈이 자아내는 옷감에 휘감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예고되지 않는 죽음은 '소녀의 꿈'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미지의 불안을 안고있는 점에서는 무거움을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를 기대하게 된다. 순정 만화 같다는 느낌은 그녀들의 사소한 생활의 예에서 비롯한다.

이제 막 소녀의 티를 벗어난 그녀들의 아기자기함, 그리고 죽은 '치즈루'의 모호한 심리와 갑자기 호텔방에 들이닥친 여인인 유령이 이 소설의 매력적인 부분으로 작용한다. 아침 햇살 속의 공기방울처럼 가볍게 죽음을 건드린다.

'밖에는 우유처럼 짙게, 손으로 만져질 듯 자욱한 안개처럼' '하드보일드'는 죽음을 추억하고 꿈을 뒤섞어 속삭인다.

"죽음과 삶의 명료한 구분은 확실하다. '슬픈 것 같은 꿈'이지만 이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은 다시 어제의 일을 기억했지만, 그것도 방을 관통하는 눈부신 빛 속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로 여기듯' 다시 아침햇살을 받으며 삶은 희망으로 다가온다."

두번째 이야기 '하드 럭'

두번째 이야기 '하드 럭', 불운이라고 번역되는 이 이야기 또한 언니 '쿠니'의 갑작스런 과로사를 다루고 있다. 나는 '하드보일드'보다 '하드 럭'에서 더 '죽음'을 느낀다.

죽음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들어 가까운 사람을 잃어 본 적이 있는 나는 죽음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가까이 가게되는 통로, 그 어둠의 긴 터널이 죽음보다도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감지하면서 '하드 럭'은 나의 지난 일들과 겹쳐 한층 감정이입이 쉬웠다.

뇌사 상태의 언니를 보며 '이제 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는 물론이고, 이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손이 따스하고 손톱이 자라고, 숨소리가 들리고 심장이 울리면, 어쩔 수 없이 좋은 쪽으로 온갖 상상을 하고 만다.'

동생은 '언니가 좋아했던 귤을 언니에게 냄새를 맡게 해줘야지' 하고 코에 갖다 대었더니 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웃으며 '아아, 좋은 냄새!'하고 방울 같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냄새에 환기된 순간의 백일몽을 보면서 그녀의 친구 사카이 씨는 말한다.

'지금 그건, 귤이 보여준 광경이야. 귤이 쿠니씨에게 사랑받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서, 무언가를 되살려 보여준 거지.' 죽어가는 이를 지켜보는 가족의 심정이 단적으로 표현된 구절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쓰러운 마음의 절절함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서, 살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한 모습에 또 한 번 아픈 자각을 한다. 언니를 생각하면서 한적한 곳에서 이성을 느끼는 사카이 씨와 호젓하게 차를 마시며 '오랜만'이란 기분을 느끼게 되는 비정함, 언니를 떠나보내고 동생은 자기를 좋아하게 된 사카이 씨와 이렇게 대화한다.

"지금은 한겨울이고, 당신 마음은 충격으로 요동치고 있어, 하지만 여름이 오고, 내일 이탈리아로 놀러 가면, 당신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을 안내해 줄 거지?"

"물론!" 이 명료한 한마디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는 확실히 감지된다. 어쩔 수 없다지만 슬프고 좀 화가 나기도 한다. 어쩌면 죽음은 죽은 자에게보다 죽음을 지켜 보는, 산 자에게 효용이 있으리라.

"겨울의 별은 언제 누구와 올려다보아도 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변하는 것은 나뿐이다. 오리온 자리의 별 세 개가 변함없이 거기에 있었다. 언니와 다투어 찾아내곤 하던 그 모양 그대로...

그래, 노래처럼,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한 번 뿐인 올 가을은, 오늘 밤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가, 저 멀리로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겨울이 힘차게, 잔혹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을 지켜본 자. 흐르는 시간 속에 고정되었던 순간들을 추억하며 잔인하게 찾아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그런 일들이 이제 작가 바나나에겐 조금씩 걸러지고 다듬어져 한 켠의 여유를 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에게 죽음(이별)이란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가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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