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자도 없이 일년 동안이나 천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그쪽 형편이 어려워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더 빌려주고 왔단 말이야?"
"자기도 형편이 어려워서 아이들 학비도 변변히 대기 힘든 처지에 도대체 김 형은 제 정신인거야?"
흥분한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간다.
"아니 학원을 하는 사람이 당장 버스에 쓸 기름값도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빌려줘요. 그렇다고 제가 당장 밥을 굶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한다.
"자기도 돈이 없어서 가게수표를 끊어서 빌려준 게 잘한 일이구먼."
그러면 그는 미안한지 피식 웃으며 또 그의 지론을 편다. "그래도 남을 도와준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의 또 다른 지론은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돈을 잃는 게 낫다"는 것이다.
물론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말이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해선지 거의 성현군자이다. 한자성어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내 눈에는 참 한심해 보인다. "그렇게 갚을 대책도 없이 남의 돈을 자꾸만 빌려가는 사람은 차라리 잃는 게 낮겠다."
그러면 그는 "에이 형님.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사람도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런 거지요"한다. 그러면 나도 또 할말이 있다.
"자기도 이번에 물건 들여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며?" 그도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은 일식삼찬으로 엄격하게 묶어놓고, 자신은 몇 벌 되지도 않는 낡은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가보아도 떼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아무런 담보도 없이, 이자도 전혀 받지 않고 돈을 선 듯 빌려준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보아 그는 무모하기 그지없다. 마음으로는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도 집에선 아내에게 "김 형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이 얼마나 좋겠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 형을 아끼는 나는 그가 '선한 일'을 하나씩 하고 올 때마다 야단을 친다. 어리석다고도 하고, 그런 여린 마음으로 어떻게 세상을 사냐고 묻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의무를 묻기도 한다. 그는 혹 그런 나의 말들을 칭찬으로 듣는 것은 아닐까?
그는 외국어를 잘한다. 그래서 문서 번역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다. 번역대행업을 하는 이도 그에게 부탁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묵묵히 번역을 해준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는 수수료를 안받는다. 직접부탁을 하는 것은 물론 번역 업소에서 수수료를 받고 부탁하는 건에 대해서도, 그는 한사코 수고료를 받지 않는다. 자꾸 사양을 하니 이젠 아예 줄 생각도 않는다.
"왜 주는 돈을 받지 않는 거야?"라고 또 언성을 높이면서 물어본다. 그러면 그는 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잠시 긁적여 주는 건데 그걸로 뭐 돈을 받고 그래요, 야박하게" 나는 화가 나서 또 묻는다. "엉뚱한 사람이 돈을 받아 챙기잖아." 그러면 그는 "그건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요, 나는 그런 일로 돈을 못 받아요"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여유가 많은 것도 결코 아니다. 하루하루를 빡빡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중고차는 자꾸만 수리비를 요구한다. 그에게도 자식들과 아내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없다. 그의 가족사랑은 세상이 다 알만큼 유별나다. 그런데도 그는 사정이 딱한 사람을 보기만 하면, 떼일 것이 뻔한 돈을 꾸어주는 버릇을 도무지 버리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돈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도 자꾸만 나이를 먹어가서 이젠 사십 줄에 접어드는데, 장래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수입을 올릴 수 있을까' 그도 생각이 많다. 가끔씩 나와 저녁 늦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자신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못자는 날이 많다고 나에게 고백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해 그도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그는 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밝은 얼굴로 희죽이 웃으며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멀쩡한데 무엇을 한들 밥이야 굶기야 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또 쏘아 붙인다. "이 사람아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가?" 그러면 그는 말한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해야지, 형님은 왜 그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자꾸 생각을 하세요?"
나도 안다. 그의 말이 백프로 옳다는 것을. 그는 그가 형이라고 부르는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다. 그는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그 생각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그를 칭찬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세상이 악해선지 내가 용기가 없어선지, 나는 아직도 몰래 마음으로만 그를 칭찬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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