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경계인' 송두율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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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경계인' 송두율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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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두율 교수
ⓒ 뉴스타운 자료사진^^^
남북간의 경계인’, ‘내재적 접근론’등 새로운 용어를 창조하면서 국내 좌경 세력과 한총련 등 반미 친북 성향의 청년 학생들에게 친북 의식화 이론을 제공해 온 주요 인물인 송두율이 입국하여 새로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한편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건전한 안보관을 가진 대다수 국민들은 송두율에 대해 ‘북한 고위 간첩임으로 엄벌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나, 현 정부 출범에 공로가 있다고 자부하는 세력과 환상적인 통일 지상주의에 젖어있는 일부 인사들은 ‘송두율은 학자적인 양심에 따른 민주화 운동가 임으로 처벌 주장은 냉전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대 인식을 하고 있다.

송두율의 진면목은 무엇이며, 왜 이시기에 방한하려 했고, 누가 그의 방한 활동을 비호하려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송두율 케이스와 유사한 대남공작 사례들에 비추어, 송두율을 활용한 북한 대남공작 지도부의 공작의도와 그 속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송두율은 분명히 우리에게 해를 끼쳐온 북한의 고위급 간첩이며, 북한의 입장에서는 비중 있는 대남 영향력 행사 공작원이다. 계속 수사 중인 사건임으로 송두율을 간첩으로서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무리이다.

반대로 북의 공작기관이 송두율을 대남 공작원으로 포섭 활용해 온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송두율의 정체에 접근하는 지름길이라고 보아 북한 공작원으로서의 송두율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는 것이며
혼란스런 국내 정치 상황과 사회의 이념 갈등 문제까지 거론하고 싶지 않다.

국가 안보의 중추적 역군이라는 자긍심을 삶의 첫번째 가치관으로 소중히 간직해 가야 할 우리 국민이, 국가의 정체성이 동요하고 있는 이 시기, 송두율 사건의 진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다.

북한 대남 공작 지도부의 이해

북한의 유일 절대적 통치자인 김정일은 김일성 시대에도 대남공작 부문을 전반적으로 장악 운영했다. 김정일에 의한 1975년 대남 공작기관에 대한 ‘집중 지도 검열’ 이후부터이다. 주요 대남공작원에 대한 교육과 격려는 김일성이 직접 담당하고 김정일은 배후에서 모니터링을 하곤 했다.^

‘집중지도검열’이라는 형식의 대 숙청 극에 의해 장기간 대남공작 경험을 축적해온 간부들을 대거 제거한 이후, 대남 지하당 구축 공작과 같은 정교한 공작이 쇠퇴한 반면, 교묘하고 대담한 대남 정치 공작은 김정일이 지휘하게 되면서 오히려 강화되었다.

위장 평화 공세, 남북 대화 공작, 국내 좌경 및 반미 친북세력 확대를 위한 사상 선전 공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교한 공작보다는 김정일 식의 거칠고 대담하고 단순한 공작기법을 동원하게 됨에 따라,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낭비하는 국가테러 성격의 폭력공작을 자주 감행하여 역작용과 큰 손해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고한 인명 피해를 낸 KAL858기 폭파 공작, 아웅산 묘지 폭파 공작 등이 그것이며, 테러국의 오명과 국제적 고립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대남 공작은 김정일의 승인과 지도 하에 수행됨으로 북한의 대남 공작 지도부는 곧 김정일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특히 공작 자금은 김정일의 별도 비자금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어, 저들의 경제사정 여하와 관계없이 아끼지 않고 쓰는 편이다.

송두율의 경우

아무리 노동당원이고 서열이 높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철수’라는 가공 인물의 몫이며, 송두율 자신은 북한 공작기관이 독일에 파견한 공작지도원의 지시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공작원 신분에 불과하다. 평양의 주요 행사참석시의 예우는 다르다. 당서열도 그렇지만 ‘수령’을 직접 만나고 ‘교시’를 받은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작 교육과 임무부여 시에는 공작원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최초 포섭 당시의 사상학습, 보고 및 연락방법, 보안 등 공작원 기초교육은 평양에서 받았을 것이며, 평소의 자금지원 및 보고와 감독은 독일파견 공작지도원이 담당한다.

변절 방지와 격려 및 교육을 위해 1-2년 1회정도 평양에 소환되어 일정기간 머무르고, 김일성의 직접 대면 교육(통상 3-6시간)과 격려(사진쵤영, 오찬)를 받는다.

공작조직과 개인

조직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동일 목적을 꾸준히 계획적으로 추구하는 조직요원은 활용의 대상이 되는 개인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노동당이라는 조직에 입당한 것은 초라한 개인이 조직 앞에 굴복한 것을 의미한다. 북한 측의 단계별 포섭 공작에 송두율이 순응한 것이다.

송두율은 가난한 시절인 1968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7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기간에 북한 공작기관의 촉수는 거의 대부분의 유럽 체류 우리 유학생들에게 뻗쳤고, 유명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우리 유학생들이 알바이트로 생활과 학업을 같이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의 비민주적인 정치 상황과 유학생들의 경제적 궁핍이라는 약점을 적절히 활용한 북한의 공작지도원들이 철학 전공의 송두율을 포섭하기는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사상적인 기본을 갖춘 송두율을 유학 5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시킨 것은 북한측에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적의 적은 우군’ 이라는 단순 심리와 자금과 장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어우러져 송두율 본인이 더 적극적이었을 수도 있다.

입당 시에는 누구나 서약과 선서를 해야 한다. 노동당과 당 중앙(김정일-김일성과 동일시한 ‘수령’))에 대해 절대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종요한 행사이다. 송두율은 1973년 9월에 입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했으니, 30년 전의 일이다.

북한측이 대남 공작원에게 노동당 입당을 허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 송두율은 이듬해인 1974년 3월 백림에서 친북 반한 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하고 이 단체의 1,2,5,6대 회장을 역임했다. 북한의 계획과 지령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송두율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1991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정되고, 1994년 북한 권력 서열 23위로, 1996년에는 20위로 추대된바 있다. 이것은 대남 비밀 공작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의 ‘지도 핵심’이 되었음을 의미 한다.

공작원에게 ‘假名’을 부여했다는 것은, 포섭이 완료된 비밀 조직원임을 의미한다. 신분을 은닉해야 하며, 활동은 은밀해야 하며, 목표에 대한 위장(신분 가장) 침투와 조국(북한)과 목표(대한민국)에 대한 ‘잠입 탈출’이 용이해야 함을 뜻한다.

오랜 동안 신분위장 활동에 습관이 된 경우 조직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 할 수 있다는 각오가 굳어지게 되어, 생사가 좌우될 정도의 특별한 계기가 있다거나 장기간의 회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전향하기가 어렵다. 이들에게 전향은 곧 정신적 사망을 의미한다.

송두율이 북한 공작원의 본분을 솔직히 시인 반성하거나 북한 체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저간의 상황 전개로 보아 당연한 것 같다. ‘남북 경계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은 북한 공작 지도부와 상의한 결과로 보인다.

송두율과 같은 기회주의적이고 소영웅주의적 인간형으로서 특히 가난한 지식인 부류에 속할 경우, 조직적인 협박과 약점 조성에 의한 포섭 공작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지식인 들은 조직 배반 시 가해질 것이라는 보복 위협을 긍정하고 두려워한다.

장기간 조직원으로서의 사고와 행동 습성이 몸에 배게 되어 임무 성취를 위한 거짓말이나 조작 선동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된다. 자신의 ‘대남 공작원’으로서의 신분노출을 우려하여 송두율이 신분과 관련된 말을 자주 바꾸고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은 소속된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조직원으로서의 책무를 우선 고려하기 때문이다.

친필 충성 맹세문’과 ‘명절(김일성 김정일 생일)축하문’을 김정일 앞으로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은 목표지역에 침투 활동 중인 모든 공작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 된다. 가명이 부여된 비밀 요원일수록 충성맹세문의 요구 강도는 높아진다.

조직에 대한 복종과 충성심을 유지시키고 약점을 축적하여 배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송두율이 최근 까지도 충성 맹세문을 북측에 보내온 것은 북한 공작 기관에 대한 변함없는 소속감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공작 참여 정도에 따라 공작원은 ‘意識공작원’과 ‘無意識 공작원’으로 분류된다. ‘意識공작원’은 공작조직에 가담하여 본부를 위해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자이며, ‘無意識 공작원’은 자신의 행위가 공작 본부에 유리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가지되 공작 조직에 가담하지 않아 소극적으로 활동하는 자이다.

송두율과 그를 적극적으로 庇護 지원하는 국내 관련인물 몇 명은 북측의 ‘의식공작원’들이고, ‘송두율이 그러한 인물인지 몰랐다’면서 발을 빼려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상당수의 국내 인물들은 북측에서 간접적 후원 세력으로 인식하고 ‘무의식 공작원’으로 분류 활용하는 대상이라 하겠다.

송두율의 주요 공작 활동

송두율 자신이 스스로 밝히거나 전향하지 않고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북한 노동당 서열과 주변 여건을 고려하고 그간 나타난 그의 행적들을 종합해 보면, 송두율이 수행해온 공작 임무들을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겠다.

순수한 학자가 무슨 간첩 질을 하겠는가고 의문을 표하는 ‘인도주의자’(?)들이 우리주변에 너무 많은 것 같아 그의 반역죄들을 요약 나열해 본다.

1) 유럽 거주 반한 교포 조직 활동 주도
2) [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 운영하여 남한 사회혼란 및 국제적 반한 여론 조성
3) 북한측에서 개최 주도해온 각종 반한 친북 국제 집회 참여 및 지원

*1982년 로마에서 개최한 ‘김대중 구출을 위한 국제 연대 회의는 개최비용을 북한에서 지원했음은 물론이고 회의장 출입 통제와 경비를 북한 요원들이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회의장 내는 여러 나라의 친북 반한 인물들 20여명이 참석 했지만, 회의장 외부에는 평양(2명) 및 유럽 각국에 파견 활동 중인 북한 고위 공작 지도원들(5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송두율의 후임으로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이종수 KBS이사장은 ‘민건’이나 ‘김대중구출위원회’는 북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적극 변명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4) 남한 정세 및 국제정세 분석 및 관련 첩보 및 자료의 수집 제공

* 송과 같은 지식인공작원의 경우 통제 장악을 위해서도 어느정도 쉽게 입수할 수 있는 함국정세 동향과 자료를 수집 보고하도록 한다.

5) 한국 학자 및 유학생들의 입북 권유 및 주선

* 송두율의 설득으로 가족과 함께 ‘지식인의 낙원’이라는 북한을 방문했다가 이상과 다른 참혹한 현실 상황을 보고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씨(현 통일 관계 연구소 연구위원)의 경우는 눈물의 사연 그대로이다.

오씨는 입북을 말리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오히려 북에 남기게 되는 생이별을 당한 후 송두율과 국제기구 및 독일정부에 가족의 합류를 호소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 했으나 실패하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후문에 의하면 아내와 딸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다. 이번에 그 오길남 씨가 가족 생이별의 장본인중 하나인 송두율을 만났을 때 인간적인 위로나 속죄의 인사 대신 ‘당신의 입북을 권유한 적 없다’는 냉냉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라 한다.

*송두율이 관여 했는지는 불확실 하지만, 1987년 미국 명문대에 유학중인 이모 국회의원의 외동아들이 백림을 경유하여 호기심에서 여행 삼아 입북한 후 귀환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건장했던 이 청년은 몇년후 북한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다. 낙심한 부친 이모의원은 정치생활도 접고 수년간 눈물로 아들을 찾으려 애쓰던 모습이 상기된다.

6) 국내 친북 좌경세력과의 연계 하에 ‘指導核心’으로서 남조선 혁명 환경 조성을 위한 선전 선동 활동-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론’으로 친북의식 고취

*김대중 정권초기 전국적으로 벌어진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이론적 바탕은 바로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론’이었다. 이외에도 국내의 반미 친북 세력에게 송두율의 강의와 이론 서적이 미치는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의 이번 방한이 국내 청년학생층에 확산되고 있는 반미 친북의 바람을 타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 진다.

* 송두율의 우리말 저서
[계몽과 해방], [소련과 중국], [전환기 세계와 민족 지성],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역사는 끝났는가],
[21세기와의 대화],[경계인의 사색]

송두율의 입국 배경과 이유

김정일은 대남 공작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 장악후인 1976년 공작 부문 간부회의에서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투쟁에서 지도 핵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도핵심이 없는 지하당 조직은 어려운 조건에서 장기적으로 견뎌 낼 수 없으며, 반대로 지도핵심이 준비 되어 있으면 필요할 때 혁명역량을 급속히 확대 강화할 수 있다. 나아가 때가 조성되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일관성 있게 추진해 왔다.

또한 대남 전략은 ‘남조선 혁명 전략’(남한의 민주화 혁명)과 ‘조국통일 전략’(연방제통일, 종국적으로 무력 통일)으로 구분하여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 전술로서 ‘선전선동을 통한 정치사상공세를 강화하여 각계각층을 의식화 한 뒤 대중을 조직화, 즉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과 ‘청년 학생들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은 김대중 정권이 내세운 ‘햇볕정책’을 역이용하여 혁명 환경 조성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만족 해 하고 있고, 저들이 바라던 인물이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수많은 ‘성분이 좋은’(좌경 성향의) 인물들이 남한 정권의 요직과 주요 단체장 및 언론기관을 장악하게 되자 성과 확대를 위한 ‘지도핵심의 새로운 포치’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북한의 일선 공작지도원들은 흔히 과장 보고를 하고, 김정일은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절대적 독재자 일수록 수하조직의 아부성의 과장 보고를 여과 없이 받아드리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김정일은 남한의 혁명 여건이 기대 이상으로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김대중 정권 5년간, 국민의 안보의식 무장 해제,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의식 약화, 최근 1-2년간 괄목할만한 반미 친북 세력의 역량 확대 및 활동의 격화, 그리고 좌경혁신 정당들의 공공연한 출현 등이 김정일을 크게 고무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명년 총선까지 ‘진보적’ 청년학생 층의 동원과 결집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바, 그 일환으로 반미 친북 논리의 대표 주자 격인 ‘지도 핵심’ 송두율을 남한에 보내 합법적 투쟁 공간을 마련토록 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 측이 송두율 사건과 관련하여 평양 방송을 통해 ‘송두율과 노동당은 관련이 없다’고 즉각 부인한바, 이것은 오히려 북측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송두율이 활동해 왔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저간의 남한의 민주화(좌경화) 상황과 대북 정보 수사기관들의 무력화 등을 고려하여, 송두율이 해외 민주화 인사로서 대접 받으면서 합법적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북측과 송두율이 판단한 것 같다. 현 정부의 관련 고위 인사들의 언질과 국내 지원 세력의 권유도 어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송두율 입국 정착을 위해 국내 지도층 일각과 북한의 의식 무의식 공작원들이 보여준 협조 지원 양상은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송두율은 국내에서의 합법적인 선동 활동을 목적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본인의 좌경적 이론에 대한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국내 정착 요건인 구체적인 전향을 주저하고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조사에서의 언급 내용과 언론 회견시 발언 내용이 다른 것은 그러한 주저감 때문이다.

반면에 김정일의 배포와 교활성을 고려하건대, 송두율의 엉거주춤한 사상적 자세를 한국 사회가 끝내 거부하여 추방할 상황에 이르면, ‘고뇌의 결단’이라면서 ‘위장 전향 수법’을 택하게 할 가능성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결어

이번 송두율의 입국으로 인해 다수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고, 관련 논쟁과 나타나는 진상들이 송의 귀국을 주도한 자들에게 역풍으로 작용 하는 것 같다.

국내 대북 유화론자들과 북한 김정일의 판단과 의도에 반하여, 보통 국민들 다수가 북한 집단을 혐오하는 안보가치관과 애국심이 의연히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반작용이 거대하다는 것을 저들에게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스럽다.

김정일의 판단에 의한 대남공작이 일시적으로 교묘함은 보일 수 있을 지라도 원천적으로 허위와 조작을 바탕으로 계획 추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시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이번 사례를 계기로 우리 국가 지도부 인사들의 안보의식이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문기관의 엄정한 관리와 사법 당국의 추상같은 공평한 법 집행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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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신중히 2003-10-14 19:04:49
신중히 해야됩니다. 말못하는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민심 똑바로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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