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황석영의 '변명'을 박(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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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황석영의 '변명'을 박(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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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에 대한 황석영의 변명 그 후를 읽고

필자는 10월 1일 이곳 '사이버논객'의 창을 빌어 대갈일성 한 바 있다 '송두율씨를 즉각 구속하라'는 제하의 글이었다. 그 속에서 필자는 지금 박駁하고자 하는 '송씨는 냉전의 아픔, 조국이 끌어안아야' 한다는 얼간 작가라는 표현으로 황석영 그의 글에 대한 소회의 일단을 피력한 바 있다.

그간,장본인 송두율과 변호사를 만나 설득의 경위를 밝힌 내용대로라면, 송두율은 그야말로 현명한 판단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한 지성과 성찰의 산물로서의 자신을 가꾼 인물일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떠한가? 황석영이 구구절절 인정하듯, '실망'만을 남긴 현실에 대하여 '그후의' 변명으로 자신의 입장을 얼버무리려 들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이 우려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석영이 픽션세계를 그의 작품 속에 그려내는 것과, 직면한 논픽션의 격차가 어떠하다는 것을 황석영 그가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소위 망명작가로 행세하며 떠돌다 귀소본능의 원초적 감회를 떨구지 못해, 법적 처벌을 감수한 전례에서 그것은 극명히 규명된 것이다.

그 어떤 사상, 유토피안도 바로 황석영이 보여 준 '소속' 이라는 바탕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는 스스로를 들어 입증시킨 장본인에 다름 아니다.

그가 조국을 나서 헤매다닌 부평초 같은 그 어떤 세계일손 조국 '한국'에 비함에 있어 못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그곳 어딘가에서 둥지를 틀어 그의 생애를 구가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의 보편성을 계속 자랑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통쾌하게 그 리얼리티를 전파해야 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가 찾아 나선 세계에서 승자의 환희를 천착해야 하고 그곳에 토착하는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어야 온당한 것이다.

필자는 그의 행각이 '살아야 한다'는 바로 그 '서바이벌'게임의 핵인 인간의 명제적 목표를 순순히 지킨 점에서 일말의 동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터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세계와의 접선을 사는 날까지 한양 거머쥐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작가요 인생이자 국민'이라고 곳간에 박아 놓은 지 이미 오래라.

하기사 떠나지 않고도 도를 깨쳤다는 '원효'의 아류를 드리 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패도 성공일 수가 있다'는 패라독스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아침에 길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공자의 세계만큼이나 진하고 깊은 것이 삶인 걸. 암 그렇지! 예수도, 소크라데스도 그가 산 당대의 땅, 그 텃밭의 법리적 존재였던 것을.

설령 그것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그곳에 속성화되지 않은 것은 '기분전환용' 구실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삼척동자라 해서 모를 리 없다. 항차 지식인 황석영임에랴!

가상의 세계를 현실세계에 직면하여, 논하고자 함에 있어서는 그에 걸맞는 동시대의 땅의 풀,나무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고 많은 사람들을 가눔하는 '법리'가 하나의 준거라함을 황석영 그가 언감생심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유유상종이 그래서 발호해 온 인류사를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인과응보를 변호함에 있어 그것처럼 효험있는 굴레는 없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기기묘묘한 인간의 정신세계다 부자父子라 해서 부부라 해서 사제라 해서 혹은 붕우라해서 어찌 그것을 다 안다 하겠는가?

술잔을 나누고 담소하며,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안다고 말하고 변명을 농하는 것은 미상불 끼리끼리이자 동병상련의 말초적 현상일 뿐인 것을 알기나 할까.

작가는 무엇인가? 지어내는 자인가, 있어도 그만, 있으나 마나한 준거 곧, 사회의 정의를 보는 눈이 다를 수 있는 것과 달라서는 아니된다는 것의 척도가 불명확할 때, 그의 최종적인 평가는 무엇인가? 작가라 하여 그가 주변을 살핌이 없이 독단할 수가 있을까?

서로들 여럿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여 정해놓은 이른바 정의의 저울추를 든 '법리'가 아닌가? 작가라고 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가눔해도 좋다는 황금율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있지를 않다는 것 또한 우리의 황석영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설득에 실패한 것은 황석영 그에게 '얼'이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대변하여 논할 수 밖에 달리 담론이 없을 것이다. 생색이나 내는 동류의식 가지고 무엇을 설득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무슨 문화적 쇼크가 아니라, 송두율 그가 황석영을 신뢰치 않고 있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뭘 몰라도 한 참을 모른 채 황석영 그가 저지른 업보의 허물벗기를 계속 중인 이곳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송두율의 무엇을 어떻게 포용하라는 말인가?

만일, 송두율을 의법조처하라는 한국적 정서를 감성적인 무분별로 치부할 생각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차제에 그런 순진한 '오해'의 틀에서 자유로워 지라고 권하련다.

가까운 이웃에다, 생각과 행실이 유사한 동류의식의 공유자들 중 하나인 필자가 하필 무슨 원수가 졌다고 대뜸 '법'을 논하고 인간을 말할 것인가? 혼자 살고자 함이 아니지 않은가?

송두율 그는 인류공통의 세계관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잣대에서 보았을 때, 스스로 '경계인' 운운한 오류에 대한 죄값 하나로 그렇게 된 것이다. 북쪽의 내재적 가치' 판단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을 그요 황석영이 아니지 않았을 것이다.

양자를 아우른다는 고상한 이상은 자칫 양쪽의 정체성을 용광로에 담아 녹여 낼 그 무엇을 상정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것 아닌가? 황석영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가치는 오로지 대한민국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은 또 아니며, 그것이 그가 평생을 두고 찾아다닌 그리고 지금도 찾고 있는 세계적인 것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황석영의 장길산을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그냥 그 스토리의 전개 솜씨가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송두율을 변명하고 있는 논픽션도 재미있는 픽션으로 삼기 위해서는 좀더 성숙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 오늘 이 논박의 결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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