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이 속으로만 꿍얼거리면서 책상을 정리했고 딱지들은 한 군데 잘 모아 두었습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내 버려뒀습니다. '둘 다 여자 아이들이니까 딱지 치기 할리는 없고 혹시 학교에서 숙제로 내 준 공작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책상을 어느 정도 치우고 나서 아내에게 "방 안에 딱지들이 있는데 왠 거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시 안 버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들은 큰 아이가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만든거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애는 이번 학기부터 '민속놀이 반'에 들어가 특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돌아 온 큰 애 보고 "민속놀이 반은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 딱지를 만들어서 딱지 치기도 하고요, 재기도 차고 그래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딱지를 만들어 논다는 것이 좀 신기했습니다. 저희어릴 때는 딱지고 구슬치기고 학교에서 특별 관리 안 해줘도 잘만했거든요. 딱지를 만드는 재료도 다양했습니다. 신문도 있었고 다 쓴 노트와 교과서 그리고 달력을 가지고 만들면 됐거든요. 그리고 별이 그려져 있는 동그란 딱지와 구슬은 문방구에 가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나 봅니다. 이런 것들이 민속놀이 축에 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애들은 뭐하며 노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을 보면, 학원에 갔다온 다음에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는게 전부입니다. 여기 교동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해야 자전거 타고 다니거나 컴퓨터 하는게 고작입니다.
지금도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창문 틀 위에는 접은 딱지 5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학교에서나 필요하지 밖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놀잇감 같습니다. 우선은 같이 놀아 줄 또래 친구들이 없고, 설령 친구들이 있다 치더라도 학원, 컴퓨터, 텔레비전 때문에 놀 시간도 없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큰 아이가 만들어 놓은 딱지들은 하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오자마자 "엄마, 내일은 선생님이 구슬 5-6개를 가지고 오랬어요" 라고 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구슬도 딱지 신세가 될 겁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여자 애들이라고 좀 화가 납니다. 딱지, 구슬, 재기차기에 대한 얘기라면 아빠한테 물어봐도 될텐데 꼭 엄마하고만 의논을 합니다.
얼마 전에도 작은 아이보고 "아빠는 몇 번째로 좋아?" 하고 물어 보았더니 21번째로 좋답니다. 처음엔 맨 꼴찌라고 하더니 1등은 누구, 2등은 누구 하면서 계속 따져 물었더니 결국 여기에서 멈춰 섰습니다. 당연히 엄마는 1등이고 그 다음부터 언니, 할머니, 외숙모, 사촌 언니 등 생각나는 친척들을 다 찍어 붙인 결과입니다. 그래도 30등 안에 들었으니 다행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가 되었어야 하는데 인심을 많이 잃은게 사실입니다. 오늘도 작은 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군가 하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더니 " 저 모영이 친구 아무갠데요, 모영이 좀 바꿔 주세요" 하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 야, 모영아 네 친구 전화다'하고 냉큼 수화기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집 사람이 한 마디 했습니다.
" 아니 어떻게 전화를 그렇게 받아요?"
" 내가 뭘?"
" 그래도 딸 친구가 전화를 했으면 '그래 알았다' 하는 한마디 정도
는 하고서 전화를 바꿔 주는 거지요. 전화건 애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 하겠어요"
순간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친구 집에 전화 했는데, 제가 그런 일을 겼었다면 무안했을 겁니다.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섭고 매정한 친구 아빠로 전락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보았던 무뚝뚝하고 차가운 아저씨들의 모습,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 같은 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런 분들의 모습이 제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본 것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니까 좀 씁쓸했습니다.
이러다가 딱지와 구슬이 " 여보슈, 우리하고 친구 합시다"하고 달려 들까봐 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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