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는 불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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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는 불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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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세계의 도시를 가다[18]

^^^▲ 바그다드 시가지 원경
ⓒ 박선협^^^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방

미국이 하필이면 이라크를 침공했을까? 그것은 과연 '해방전쟁'일까? 미워서 일까? 좋아서일까? 아니면 그것의 함의가 깃든 '애증'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후세의 사가史家에 맡길 수밖에 달리 없을 것이다.

불과 200여년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다. 역사에 대한 진힌 투기심의 발로가 폭발했다는 비아냥이 거기 깔려 있다. 메소포타미아 땅에 맺힌 역사의 숨결에 비하면 미국은 그야말로 코끼리 발에 워커를 신은 꼴에 다름 아니다.

바그다드를 얘기 하기전에 기자가 메소포타미아를 감상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명칭은 '두 강 사이(between the rivers)'라는 두 헬라어의 음역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두 강이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명칭은 '두 강의 아람(Aram of the two rivers)'이라는 의미의 '아람 나하라임'(창24:10; 신23:4; 삿3:8)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충적토 평야지역을 말하는데, 오늘날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인 북부의 앗시리아와 충적평 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Sumer)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최고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 사막이 며, 연간 강수량도 200mm 이하로 건조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충적토 평야지역은 북동방향으로 약간 기울은 형태의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서의 길이가 960 km이며, 남북 간의 폭은 320 km나 되는 광대한 지역이다. 북쪽에는 타우러스 산맥이 위치하고 있고, 동쪽에는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 지역은 해발 180m 이하의 대체적으로 낮은 지역이다.

이 지역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 그리고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과 직접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었던 바벨론과 앗수르 등과 같은 고대 제국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리적 요소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이다. 이 두 강은 터키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아라랏산의 동쪽(티그리스)과 서쪽(유프라데스)에서 각각 발원하고 있다.

이 두 강은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바그다드 근처에서는 두 강 사이가 약 36 km정도로 가까와지고, 페르샤만에서 약 160 km 정도 떨어져 지점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강으로 합류하여 바다로 유입이 된다.

유프라테스강(Euphrates River)

알 푸라트(AL-Furat), 터어키어로는 프라트(Frat Nehri), 수메르어로는 부라눈으로 불리운다. 유프라데스강은 바이블에서 '하수'(츨 23:31), 혹은 '강'(수 24:3)이라고 언급되거나, 아니면 '유브라데' 혹은 '유브라데 하수'(창 15:18; 신 11:24) 등으로 명명되었다.

바이블에서 이 강이 언급되는 경우는 대부분 약속의 땅 이스라엘의 북쪽 한계선을 규정할 때이다. 유프라데스강은 타우러스 산맥을 지나 약 2700 km 거리를 거쳐 페르샤만으로 유입이 된다. 유프라데스강은 급류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교통수단으로서 이용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홍수 범람이 티그리스강 보다는 덜 심하였기 때문에 관개농업을 위하여 큰 가치가 있었다. 또한 유프라테스강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과 지중해 연안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업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은 보다 더 큰 풍요를 누렸던 애굽과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위치하였던 고대의 유명했던 도시들로서는 상류지역의 하란, 마리 등과 하류지역의 바벨론, 우르, 에렉 등을 꼽을 수 있다.

티그리스강(Tigris River)

터키어로는 디즐레(Dicle Nehri), 아랍어로는 디즐 라(Dijla), 성경에서 '힛데겔(Hiddekel)'(창 2:14; 단 10:4)로 명명되고 있다. 티그리스강은 총 연장 길이가 약 1900 km 이며,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 지역을 지나면서 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의 유입을 받고 있다.

남쪽으로 흘러 바그다드를 지난다. 바그다드 부근에서 유프라테스강과 가까이 접근하나 다시 멀어진다. 남부의 바스라 상류의 쿠르나 부근에서 합류하여 샤트 알아랍강(Shatt al Arab R.)을 이룬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아랫 바다'라고 부른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든다.

티그리스강은 오늘날도 그러하듯이 작은 배들을 이용한 교통로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티그리스강의 하류지역은 유프라데스강 주변처럼 강물의 흐름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중심 도시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에 정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티그리스강의 주변에 위치했었던 유명한 고대 도시들로서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 앗수르, 칼라 등을 꼽을 수 있다.

장기적인 강의 범람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지역에서는 일년에 정기적으로 두 차례 홍수가 있었다. 첫 번째 홍수는 북부 산지에 내리는 비 때문에 11월에서 3월 사이에 발생하였고, 두 번째 홍수는 겨울철 동안 쌓인 눈이 녹으면서 4월과 5월에 발생하였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범람하는 강의 무서운 모습을 앗수르 제국의 무서운 공격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사 8:7).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러한 홍수를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수로를 건설하는 공사가 있었다. 이러한 공사들은 자연히 협동의 힘을 필요로 하였고, 또한 이러한 협동력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정부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문명은 적합치 못한 자연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그다드

바그다드(바빌론)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라크공화국의 수도. 인구 약 297만. 시가지는 사행蛇行하는 티그리스강 하반河畔을 따라 길게 뻗어있다.

^^^▲ 무명 용사의 묘
ⓒ 박선협^^^

강 양안에 걸친 시가지 중 좌안(동안)쪽이 중심부르 이룬다. 라시드가로街路는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로 이라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되고 있다. 그 동쪽을 거의 병행하여 뻗은 가지가로街路는 바자르Bazar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그 부근으 중심으로하여 파이살교橋 북쪽은 구시가지, 남쪽은 신시가지의 양상을 보인다.

북부에는 옛 왕궁, 이라크 박물관, 바그다드대학 및 카지마인의 대 모스크 등이 있고 남부에는 민족해방 모뉴먼트, 유럽풍의 레스초랑, 호텔, 신주택가 등이 있다. 우안(서안)은 인구는 적으나 공항, 서부역, 방송국, 관청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종이융단, 모직물, 견직물등 직물광업과 약간의 소규모 공업이 영위되었으나, 근래 공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연간 100만톤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이 세워졌다.

국내 철도교통의 기점이자 요충고, 똫 북부의 모술을 거쳐 시리아, 터키에 이르는 국제철도, 이른바 바그다드철도의 요지이다. 또 요르단, 시리아, 이란을 잇는 간선도로의 결절점結節點이고,카이로, 베이루트와 더불어 중근동을 통과하는 국제항공로의 중재지이기도 하다.

BC300년대에 도시로 발달했던 유적이 남아있으나, 그 뒤 황폐한 한촌 寒村이 되었다가, 762년 사라센 제국 아바스 왕조의 제2대 칼리프 알만수르가 그 곳에 신 수도르 건설하면서부터 각광을 받게 되었다.

티그리스강 서안의 티그리스, 유푸라데스 두 하천을 잇는 몇 줄기의 운하가 있는 ㅇ평야에 이른바 <만수르의 원형도시>또는 <마디나트 아스살람Madinat as-Salam: 평화의 도시>라고 불리는 수도를 조영 造營하였다.

왕성은 주위 약 6,4Km, 성벅은 정원형 正圓形의 삼중성벽, 그 바깥 쪽에 너비 20,27m의 호 濠를 둘렀다. 성벽에 4개의 문이 등거리로 배치되어, 거기서 방사상으로 뻗은 가로를 따라 상점가가 발달하였다.

성내에는 높이 36m정도의 녹색 돔으로 덮힌 왕궁과 예배당을 짓고 주위에 관청을 배치하였다. 일반시민은 왕성 바깥에 살았으나 정차 많은 바자르를 가진 번화하 시가지로 발전하였다. 군대의 절반으 강의 동안 東岸에 주둔시켰던 관계로 그쪽에도 많은 인구가 모여 시가지가 발달하게 되고, 두 시가지는 3개의 주교 舟橋와 다수의 나룻배에 의해 연결되었다.

바그다드는 8세기 말에서 9세기경에 걸쳐서는 당 唐의 장안 長安,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급의 대도시가 되어, 인구도 200만에 달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해륙의 통상로가 그 곳에 집중되고 아프리카, 아시아, 북유럽 등지의 물자의 집산지가 되어, 막대한 부 富가 축적되었다.

또 이슬람 문화의 대중심지가 되어, 학문, 예술의 꽃이 피고, 세계 최고급의 학원, 병원등도 이 곳에 세워졌다.

뒤에 왕궁은 동안 東岸으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시의 중심은 동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수도가 사마라로 옮긴 적이 있으나, 그 뒤 수도의 중심은 티그리스강 동안을 따라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1258년,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아바스 왕조가 멸망되고, 시가지의 태반이 페허가 되었다. 1401년에 다시 티무르의 공략을 받아 크게 파괴되었고, 16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의 영토가 되어 20세기 초까지 지방도시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1917년에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21년 이라크의 독립과 더불어 수도가 되었다.

영국 또한 역사의 한恨이 이 바그다드에 묻어놓고 있다. 자연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그래서 우리는 짐작하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제2차 전쟁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말로 '레지스땅스'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후세인의 독재가 역사를 부흥하고자 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바그다드. 그리하여 '공중정원'의 부활을
시도했던 자리에 지금 바그다드는 불타고 있다. 그것이 멸망의 불인지 역사부흥의 불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다시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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