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는 착하다'
'내 부모는 착하다'
  • 황경란
  • 승인 2002.11.25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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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총선을 앞두고 두툼한 후보자 명단을 펼쳐보시던 내 부모는 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많은 수의 후보와 그들이 내건 공약을 뒤져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기다 한 후보를 찾는데 영 보이지 않는단다.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되면 아파트 복도 옆 난간에 보호 창을 달아주겠다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아무리 공약을 뒤져봐도 그런 공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기필코 그 사람을 찍겠다며 한참을 뒤적이셨다. 물론 그 사람은 찾지 못했다.

이제 며칠 후면, 16대 대선 후보자 명단과 공약이 우리 집 마루에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TV에서 보는 것이 고작인데, 그 들이 내세우는 것이 무엇인지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단다. 말쑥하니 잘 차려는 입었다만, 입은 옷만큼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재미없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삐삐 소리가 나는 액정이 커다란 핸드폰에 푹 빠지셨다. 번호를 누르면 핸드폰이 경쾌하게 숫자를 읽어준다. 거기에, 불이 번쩍 번쩍 들어왔다 사라지고 액정화면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귀엽게 생긴 녀석이 꼭 손자 같은 모양이다. 재미있냐 물으면, 웃기만 하신다. 말 해 뭣하겠냐는 것이다.

후보 단일화니, 합당이니, 어수선하게 떠드는 TV 앞에서 잘도 시선을 뺏겨 핸드폰과 노신다. 손가락이 뭉툭한 노인들에 맞게 다이얼 버튼도 크고 진한 색깔로 만들어 놨다. 한 번은 잘 못 걸려온 전화에 얼굴까지 벌개지시며 핸드폰을 내미셨다.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외국 사람인가 봐..." 하며 얼른 핸드폰을 나에게 내미신다. "그냥 끊어!" 라고 말하자, 어떻게 그러냐며 잘못 걸었다고 대신 말해 달란다.

이렇듯 내 부모는 예의가 바르다. 도로를 건널 때도 녹색불이 들어와야 건너시고, 횡단보도가 없으면 선 뜻 건너지도 못하고 가던 길을 되돌아가신다. 거기다, 지하철 계단이 아무리 높고 많아도 포스터 속의 할아버지가 건강이니, 운동이니, 웃으며 운운(云云)하는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으시는 분이다.


이런 내 부모가 지금 대통령 후보를 찾고 있다. 어디 핸드폰처럼 기분 좋게 불이 번쩍 번쩍 들어오고 뭉툭한 손가락에 맞게 딱 맞는 후보가 없나 돌아보지만, 백 번, 천 번, 양보하고 들여다봐도 어디에도 없다. 이젠 화가 날 지경이다. 오늘 맘 다르고 내일 맘 다른 것이 세 살 배기보다 심하고, 공약이랍시고 내 놓는 것이 하나같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나 몰라 라 하며 대충 손가락으로 아무나 찔러 주면 그 사람은 절대 아니란다. 언젠가 한번 TV에서 봤는데, 시장 통에 있더란다. 시장 통을 찾아 상인들의 손을 덥석 잡고 격려를 하는데, 그게 틀렸단다. 걸인도 만석꾼도 잠깐 왔다갔다 하면 정겨운 곳이 시장인데 그래, 거길 그렇게 왔다 가면 그만이냐고, 하루 종일 서 있어봐야, 왜, 양말을 두개씩, 세개씩 신고, 양말에 구멍이 났는지 알 수 있단다. "서민 좋아하네! 틀렸어, 그 양반은!" 이러신다.

휴... 그럼... 이 사람은 하고 찔러 주면, 너무 잘난 체 해서 싫다 신다. 그래도 나라의 반장님 정도면, 억수로 없는 척도 해도 있는 티가 나야 하는데,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싫다 신다. 거기다, 말이 너무 많아서 절대 밑에 사람이 붙어 있지 않을 사람이란다. 그럼, 이 사람은 하고 다시 물어보면, 자고로 사람은 인물값을 하게 마련이란다. 특히 남자는.

이렇듯 내 부모는 착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날카롭기까지 했다. 거기에 더 두고 봐야 안 다는 말씀까지 남기셨다. 아마도 내 부모는 선거전날까지 얇은 귀를 동원해서 이곳 저곳의 우물통신을 담아올 것이다. 내 착한 부모의 기준에 의하면, 사람은 티가 난단다. 이젠, 땡 중인지, 스님인지 척 보면 알 수 있고, 꽤 병인지, 엄살인지도 금방 알 수 있단다.

어찌 그리 잘 아냐 물었더니, 몸에 베인 생활에서 나오는 미(美)란다. 쉽게 말해 가짜는 감동이 없단다. 이제껏 내 부모의 사람됨의 평가는 감동이었던 것이다. 하긴, 문을 열면 몰아치는, 고층 아파트 복도의 바람을 막아주겠다니 이 어찌 70을 바라보는 내 부모에게 감동이 아니겠는가. 이 하나로 내 부모는 그 후보를 믿으셨던 것이다. 당신의 불편함을 바라봤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 나온 말쑥한 양복쟁이들은 하나같이 가난이 뭔지 모른단다. 배를 곯아야만 가난이 아닌데 그걸 모른단다. 쉽게 말해 극단적? 이냐 물었더니, 그건 모르겠고, 노인들이 필요한 게 바람막이지, 칼바람 부는 곳에서 주는 따뜻한 밥은 아닌데, 그걸 모른단다. 그러니, 헛다리짚고 일하다, 재미없고 반응 없으니, 하루아침에 바뀌고, 또 바뀌고 해서 민심을 잃어버린단다.

그래서 이번에도 모른 척 하고 잠이나 잘까 하다, 불쌍해 한 표 찍어줄 생각이란다. 얼마 남지 않은 며칠 동안, 손안에서 재미를 주는 핸드폰 마냥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어본단다. 그러다 속은 거면? 하고 묻자, 내 살면 얼마나 살겠냐 하신다. 너처럼 주구장창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불쌍하지.

역시, 착한 내 부모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다. 내 부모의 말에 의하면 난 앞으로 주구장창 살 것이다. 그런데도 난, 아직 후보자 기준도 정해보지 않았으니 정말이지 큰일이 싶다. 그래 안 되겠다 싶어 오늘부터 나에게 감동을 주는 후보의 공약을 찾아볼까 한다.

아참, 집으로 가는 길에 사전도 하나 사야겠다. 아니면 공약 밑에 주석을 좀 달아주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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