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5분이면 맑은 물이 좔좔 흐르던 약수터와 여름 초입이면 숨막히게 품어내던 아카시아 향기와 집 밖을 나서면 무수히 만날 수 있었던 지인들이 이곳에는 없습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닐 수 없었던 긴장하며 살았던 그곳을 떠나올 땐 여러 가지로 착잡했습니다. 부지런한 편이 아닌 제가 고생길로 접어들 것은 너무나 확실했지만 여행 가듯 이사를 가자고 정했습니다. 먼 곳으로 결정한 뒤에는 새로운 곳의 장점을 애써 찾았습니다.
24시간 문을 열어두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불 밝히던 식당과 젊은이들의 열정만큼이나 요란한 테크노타운이 이곳에는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현란하게 밝히고 서 있던 상가의 조명들 대신 오렌지색 가로등만이 선량한 서민들의 따스한 이정표가 되어 줄 뿐입니다.
끊이지 않는 차량의 행렬에 인도를 뺏기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던 좁은 도로가 아닌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가방을 이리저리 흔들며 지나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는 널찍한 인도 속의 녹색 보도 블럭이 마음을 가지런하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전학 온 사방이 높은 곳인 학교는 캠프장처럼 산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올라가긴 힘들지만 올라가서 내려다본 운동장과 동네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습니다. 평지에 밋밋한 학교가 아닌 산 속에 자리한 적당히 낡고 정겨움이 묻어나는 교정에 서니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었던 약수터가 처음에는 많이도 그리웠습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의 서러움들도 함께 출렁이며 내리는 것 같아 자주 찾던 약수터가 아쉬웠고 어두운 밤 아이들이 떠난 그네에 앉아 가만히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놀이터도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익숙한 거리와 단골로 찾아가던 가게들, 따스한 이웃들도 가끔씩 생각 속에 머물다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예전 살던 동네에 있는 직장에 가느라고 일주일 내내 지하철을 탑니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엔 어김없이 도서방 봉사도 하러 가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사한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예전처럼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 옛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지하철은 세 번이나 갈아타고 한 시간을 가야 하는데 날마다 보는 한강은 날마다 다르게 보입니다.
하늘색에 따라 달라지고 비에 젖어 달라지고 바람에 따라 달라지고 내 맘의 빛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온통 빗방울만이 한강을 가득 메우고 세상은 순조롭게 비를 맞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한강변에 서 있는 차들도 비를 맞고 낚시하는 강태공은 도시를 낚고 강물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그리움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지하철 유리창으로 절벽처럼 보이는 한강 물엔 가끔 꽃잎이 흘러가고 푸른 나뭇잎도 떠가고 상심 많은 이가 버린 담배 꽁초도 유유히 흘러갑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쳐서 힘들지만 오고 가며 한강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히 행운입니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당산역에서 합정역으로 통과하는 순간에 두 눈에 싱그럽게 들어오는 한강과 마주치면 마녀처럼 주문을 외웁니다. "이사하길 정말 잘했어."
오늘처럼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풍덩 내려앉은 날에는 정결한 기운이 내 몸 안에도 퍼져 오는 것 같습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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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해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