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의 무능 다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어이없고 기가찬 일이며 외교부의 무능과 허실이 그대로 드러난 한 일각 이기도 하다. 이러한 외교부의 무능은 이번 유명환 장관의 딸 부정 특채 사건으로 드러난 외교부의 낙하산 특채, 근친 특채가 원인 이였음이 증명됐다.
얼핏 듣기에는 타국에 나가 고생하는 외교부 직원들.. 어쩌구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파견된 나라의 언어조차 구사하지 못함은 물론 국익을 위한 외교의 본분은 망각한채 보내주는 국세로 흥청한 파티로 연일 망청대는 일이 허다 하다는게 외교부 실상을 본 교민들의 전언이다.
동물도 우성인자를 얻기위해서 근친 교배를 시키지 않는다. 자신들의 자녀들에 취업을 위해 능력 우수한 인재들은 다 탈락 시키고 근친 특채를 관습화한 외교부에 능력있는 우성인자 인재들이 있을리는 만무였겠고 근친특채로 태어난 열성인자 직원들로 외교부의 자리를 채웠으니 외교부의 무능은 당연한것일 것이다.
우리정부와 외교부가 탈북자들에 대해 얼마나 냉담한 자세를 취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기가막힌 생생한 사례들.
◆김은철(32· 1999년 입국)=1997년 초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베이징 한국대사관을 찾았다. 바로 내쫓지 않고 보름동안 대사관내에 머물면서 북한에서의 행적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데려가려는가 생각했다. 그때 공교롭게도 황장엽씨 망명사건이 발생했고 대사관에서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며 "나가라"고 했다. 황당했고 배신감을 느꼈다. 북한에서 들은 남한방송은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이며 같은 국민"이라고 했는데 왜 나를 이렇게 대하냐고 항의했더니 중국돈 5000위안을 주었다. 더 이상 버틸 엄두도 안 났고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아 나왔다.
◆김성민(41·1999년 입국)=1997년 4월 한국대사관을 찾았다. 중국동포들은 대사관에 가봐야 별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인민군 대위출신이라 받아주리라고 생각했다. 한 동포의 도움을 받아 대사관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은 냉담했다. 절대로 도와 줄 수 없다면서, 제3국에 가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군대에서 주운 삐라에는 남한으로 오라고 선전해 놓았던데 왜 이렇게 대하느냐"며 항의했지만 허사였다. 중국돈 400원을 받고 대사관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수룡(68·1996년 입국)=1995년 초 먼저 탈북했던 아들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했다. 가족을 함께 데리고 나오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일가족이 모두 탈북해 다시 한국대사관에 연락했더니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중국동포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가족 6명이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베트남까지 내려갔다. 거기 한국대사관에 찾아갔더니 그때서야 받아주었다.
◆안혁(35·1992년 입국)=1992년 봄 베이징 한국무역대표부를 찾았다. 당시는 한·중간 수교가 돼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관을 찾으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어 한국에서 받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역대표부 직원들은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북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중에 여비를 지원해 주면서 알아서 제3국으로 갈 수 없겠냐고 했다.
◆조승군(35· 1989년 입국)=1987년 12월 체코 유학시절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서독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신청을 했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몹시 당황해 했다. 북한에서는 남한사람이 북한대사관을 찾으면 무조건 환영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서독주재 미국대사관에도 망명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리스에 도착해 그곳의 한국대사관에 신청했더니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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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 특채이므로 유능과는 거리가 멀겠고. 따라서
띵가띵가 여흥이나 즐기면서 한국외교를 담당했으니
무능한 외교가 될 수 밖에...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