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수상자는 CMC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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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수상자는 CMC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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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련위원장, '불교인권상' 수상.. 남편이 대신 시상식 참석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진관스님, 지원스님)는 제8회 불교인권상 수상자로 보건의료노조 차수련 위원장이 선정되었다고 밝히고 20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한국일보사 13층 송현클럽에서 2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인권위원회 13주년 기념식과 인권상 시상식을 가졌다.

 
   
  ^^^▲ 이날 불교인권위원회 13주년 기념행사에 인권상 시상식에는 20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 석희열^^^
 
 

불교인권위원회는 "차수련 위원장은 명동성당에서 성모병원 노조원들의 인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타인의 인권을 위하여 대승보살의 정신을 실천하였기에, 그리고 불교인들에게 보살의 정신을 생각하고 귀감되게 하였기 때문에 인권상 심사위원들이 그를 제8회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불교인권위 시상식에는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한화갑 대표가 차수련 위원장의 불교인권상 수상을 축하하는 화환을 보내왔고,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는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여 축하인사를 전했다.

 
   
  ^^^▲ 권영길 후보는 격려사를 통해 불교인권위 출범 13주년과 차수련 위원장의 인권상 수상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 석희열^^^
 
 

권영길 후보는 "차수련 위원장과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이며 그는 당연히 이 상을 받을만 하다"고 추켜세운 뒤 "성모병원 성직자들은 그 동안 차 위원장에게 엄청난 정신적 매질을 해왔다"면서 "오늘 이 수상으로 차 위원장의 신음이 제발 그쳤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고 "다시는 단식하고 농성하는 사람이 인권상을 받는 날이 없기를 바란다"며 한국의 인권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반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장기파업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두달 넘게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차수련 위원장을 대신해 남편 윤윤규(KDI연구원)씨와 보건의료노조 조합원 20여명이 참석했다.

윤윤규씨는 차 위원장을 대신해 상을 받은 뒤 "인권상을 수상자가 직접 와서 받지 못하는 한국의 인권상황이 아쉽고 슬프다"며 "오늘 이 상의 진정한 수상자는 CMC 조합원들이며, 그들에게 감사하며 이 상을 바친다"면서 "이것은 차 위원장의 뜻이기도 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 이날 인권상 수상식에는 차 위원장을 대신해 남편 윤윤규씨가 참석했다
ⓒ 석희열^^^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인권단체의 한 간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모태신앙을 가졌던 그를 정작 보듬어야 할 가톨릭은 탄압의 매질을 해대고, 타종교인 불교에서는 그의 귀감을 기려 상을 주는 현실이 기막히다"면서 "최근 일련의 사태에서 보듯 노동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가톨릭의 독선과 전횡은 두고두고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에 앞서 차수련 위원장은 20일 낮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먼저 불교인권위원회가 주는 과분한 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히고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면서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과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노동기본권 사수와 비정규직 고용안정을 위해 지금도 180일 넘게 싸우고 있는 가톨릭중앙의료원, 제주 한라병원, 목포가톨릭병원 조합원들에게 이 상을 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차수련 위원장 누구인가?

 
   
  ^^^^^^▲ 이날 인권상 수상식에는 차 위원장을 대신해 남편 윤윤규씨가 참석했다
ⓒ 석희열^^^^^^
 
 

'명성황후', '철의여인'으로 불리는 그의 강성 이미지 때문에 흔히 한국 노동운동계의 여성마피아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가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대꾸 한마디 못하는 순진하고 수줍음 많은 시골처녀였다.

암울했던 시절 대학을 다녔던 그는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취미활동과 동아리활동에 더 열심이었다. 한양대 간호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80년에는 한양의대 음악동아리 메디칼사운드의 리더싱어로 활동하며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노동운동과 사회문제에 눈을 뜬 것은 83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양대병원 수술실에 근무하면서 부터다.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성수동의 산재노동자들이 당시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많이 실려오곤 했다.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그들 어린 공장노동자들이 손가락이 잘린 채로 비명을 지르며 응급실로 수술실로 실려오는 것을 보고 그는 마음이 아파 여러번 울기도 했다.

 
   
  ^^^^^^^^^▲ 이날 인권상 수상식에는 차 위원장을 대신해 남편 윤윤규씨가 참석했다
ⓒ 석희열^^^^^^^^^
 
 

차수련 위원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번은 10대 후반의 어린 환자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 수술실로 실려온 적이 있었어요. 잘린 부위를 보니까 접합수술이 가능하겠더라구요. 그러나 당시 접합수술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단을 하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의사에게 따져 물었죠. 환자의 보호자가 접합수술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보호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공장장이 보호자라는 거예요. 공장장의 입장에선 손가락이 잘린 채로 평생을 두고 불우하게 살아갈 환자의 일생보다 접합수술에 드는 비용이 훨씬 더 아까웠던 것이겠지요."

그 일을 겪은 뒤 그는 충격적이고 비정한 현실에 절망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목격하면서 복받치는 설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보상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 환자들을 보면서 그는 산재환자들의 권익과 사회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대병원 간호사생활을 하면서 부평성당에서 운영하는 부평 일대의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에 참여했다. 야학이 끝난 뒤 한 개에 100원 하는 오방떡과 만두를 함께 먹으며 그는 친누나처럼 따르는 배고픈 아이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만 해도 야학에 오는 청소년들 중에는 배굶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는 야학과 동시에 당시 부평성당 일대의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활동을 벌이고 있던 서울의대생들의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평일 밤에는 서울에서 부평까지 전철을 타고 와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을 하고, 일요일에는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활동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좋은 신부님을 만나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년 동안 계속해온 야학과 진료활동은 87년 8월 한양대병원에 노조가 생기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그만 두었다. 87년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 폭풍이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는 듯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당시 ‘호헌철폐’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군부독재를 장송하며 감격해하는 역사의 물줄기에 동참했다.

87년 당시 한양대병원 청소아주머니들이 화장실이나 배관실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호헌철페’ 서명활동을 함께 했던 직장 선후배들과 노조결성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초동주체들끼리 회의를 하고 조직을 다지는 사이 그해 8월 직장 내 다른 주체들이 먼저 노조를 결성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부위원장으로 추대된 그는 병원측과 대등한 민주노조 결성을 위해 3개월에 걸친 현 체제 퇴진운동을 벌인 끝에 그해 11월 한양대병원 2대 노조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표에는 ‘강짜’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으면서 그의 인생에 구속과 해고가 반복되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사생활과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서노협 1, 2대 부의장과 병원노조협의회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언론에 조금씩 그의 이름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90년 공안당국의 전노협 업무조사 거부 혐의로 그에게 처음으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는 수배생활에 들어가면서 이곳 저곳으로 쫓겨 다니며 숨어 살았다. 설상가상으로 한양대병원측은 수배중인 그를 해고시켰다.

임신하여 만삭의 몸으로 더 이상 수배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는 1년 4개월만에 수배생활을 청산하고 공안당국에 자진 출두했다. 집행유예로 3개월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해고 상태에서 94년 또다시 한양대병원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한양대병원측은 95년 그에게 복직합의 조건으로 2년간의 경과기간을 요구하면서 남편이 유학중인 미국에 2년 동안 다녀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2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97년 돌아와봐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약속과는 달리 병원측은 또다시 복직을 거부하며 2000년에 복직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병원측의 요구를 일축하고 합의각서 이행을 촉구하는 복직투쟁의 방편으로 한양대병원 노조원들과 함께 단식농성과 총파업투쟁을 벌이며 병원측을 압박해나갔다. 하지만 병원측은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여 그해 11월 농성자 전원을 연행하여 그를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시켰다.

 
   
  ^^^^^^^^^^^^▲ 이날 인권상 수상식에는 차 위원장을 대신해 남편 윤윤규씨가 참석했다
ⓒ 석희열^^^^^^^^^^^^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또다시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98년 3월 병원측의 노조탄압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항의로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명동성당에서 4개월간의 항의농성을 하면서 그에게 ‘명성황후’라는 별명이 붙었다.

끈질긴 노력과 복직투쟁의 대가로 98년 9월 그는 8년만에 한양대병원에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단한 여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병원측이 이번에는 그에게 상급단체에 나갈 것을 요구했다. 당시 상급단체인 병원노조연맹에서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 동안 네차례의 구속과 두차례의 해고를 겪은 그는 어쩔 수 없이 산별노조로 전환되던 시기인 99년 2월 과도체제인 10개월 임기의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간선으로 집행부를 꾸린 과도체제를 해소하고 이듬해 1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99년 12월에 직선으로 치러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3년 임기의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위원장에 선출되자마자 여의도에서 진행된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민주노총 산별연맹농성단에 합류하여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그의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도 그는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된 첫해 겨울과 임기가 마감되는 마지막 겨울을 그는 차가운 길바닥의 천막에서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별노조인 보건의료노조 직선 초대 위원장이며 민주노총의 하나뿐인 여성 산별연맹 위원장의 운명이 너무도 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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