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뜰 들꽃 ‘가을향기’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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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뜰 들꽃 ‘가을향기’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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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들꽃 예찬<1>북에서 밀려 내려온 가을꽃 내음

 
   
  ^^^▲ 물봉선 물봉숭아 가끔 흰꽃도 있습니다. 손대면 씨가 톡하고 터지기 전에 꽃잎이 녹아내리는 듯 합니다. 자작자작 물기가 많은 습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봉숭아에 견줄 수 없이 예쁩니다.
ⓒ 김규환^^^
 
 

꽃은 벌을 부른다. 나비에게 달콤한 꿀을 나눠준다. 바람을 불러 사람 발길을 멈추게도 한다. 꽃씨를 날려 들풀 사이에 조용히 버티고 있다가 여의치 않으면 가녀린 꽃대를 기린 목처럼 쏘옥 뽑아 내밀어 ‘나 여기 있어.’ 불쑥 튀어나오며 아우성이다. 애써 다가가 찾지 않아도 들길, 산길 넋 놓고 걷는 길손 마음을 열어 주니 이보다 고마운 이 있을까?

들꽃 향연(饗宴)은 귀뚜라미, 여치, 풀무치, 메뚜기, 방아깨비 “소르륵 소르륵” “찰찰, 찰! 찰! 찰!” 캐스터네츠, 탬버린 두들기듯 흥겹게 노래하는 가을이 최고다. 살갗이 오도독 닭살 돋아 마음 허전할 때라야 절정이다.

우리는 봄꽃을 들꽃이라 부르는데 인색하다. 왜 일까? 산 나무에서나 피어서 그럴까? 그러니 봄에 피면 그냥 산 꽃이라 부르는 걸까? 여름 꽃은 무리 지어 피기보다 잔뜩 겉멋이 들어 화려함만을 자랑한다. 어울려 필 줄을 모르고 제 혼자 잘 난 체 뽐내며 한 두 송이 피어있을 뿐이다.

봄엔 낮 시간 긴 해를 먹고 망울을 터트린다. 뭉쳐있다 일시에 피어 곧 떨어지고 만다. 서로 다퉈 햇볕 한 줌 더 보려고 키 작은 아이는 안중에도 없다. 한라산 바닥을 기어오르고 서귀포, 제주 시내에 훈풍을 불어넣고 뭍으로 기어올라 꽃 소식을 전했다. 시베리아로 올라가는 철새가 길을 안내하면 봄은 끝이었다.

 

 
   
  ^^^▲ 메밀꽃 필 무렵-굳이 봉평으로 가야할까요? 준 산간지역에 한창 피었습니다. 이번 태풍에 쓰러지지 않았을까 걱정이네요.
ⓒ 김규환^^^
 
 

가을꽃은 북쪽 산기슭에서부터 핀다. 시베리아에서 만주벌판을 달려 백두산(2744m) 넘고 관모봉(2,541m), 북포태산(2,289m), 남포태산(2433m) 쉬 넘어 산악철도 비탈길 타고 내려온다.

함흥(咸興)에 내려 주위 빙 둘러 한 번 쳐다보고 흥남(興南) 부두에서 목을 축이고 우로 돌아 원산(原山) 명사십리(明沙十里) 앞 바다에서 해당화(海棠花) 만나 아랫녘 소식 접한다. 내려가도 지뢰밭에 잘릴 염려 없다는 걸 확인하고 풍악산(楓嶽山 가을 금강산), 내설악에 잠입(潛入)하여 틈을 본다.

기운을 차려 백두대간(白頭大幹) 허리 오대(五臺)에 이르러 펄쩍 풀쩍 뛰어 놀다가 허송세월 맞이하기 쉽다. ‘진고개’ 깔끄막 계곡 물에 몸을 실어 월정사 앞 <한국자생식물원>에 온갖 꽃 성화니 만화방창(萬花方暢) 들꽃잔치 벌렸네. 화전(花煎)을 붙일까? 천렵(川獵)하며 “어절씨구 지화자” 흥겹게 놀아보자.

 

 
   
  ^^^▲ 마타리 가끔 하얀 것도 있답니다.
ⓒ 김규환^^^
 
 

여름 꽃이 그늘 밑에 숨어 몰래 피었다가 사라지고 가을 구름 한 모금과 참나무 그림자에 살포시 가려 해가 짧아지면 생명을 보존하려 바삐 움직여 꽃을 피운다.

가을꽃 향연은 일상을 벗고 잠시 떠나가 보면 너른 들판에 펼쳐져 있다. 산자락 어디고 찾는 이 하나 없어도 제 멋을 맘껏 뽐낸다. 그 곳이 제 집인 걸 ‘왜 그리 옹삭한 데 피어 있느냐?’ 나무랄 수도 없다. 연인을 위해 솜다리(에델바이스) 꺾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자 존재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그게 진짜 사랑 받는 야생화다.

싸늘한 빛과 어릴 적 어머니 옥색치마를 닮은 가을꽃은 징살맞게 눈이 시리다. 수정처럼 맑은 아이는 오밀조밀하다. 귀염둥이 예술품이다. 천진난만하고 때묻지 않은 찬란한 작품이다. 들여다보노라면 눈에 찬이슬이 송글송글 맺혀 오래 쳐다보지 못하겠다. 사춘기 시절 오빠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 돼지풀 고마니. 마디가 있기는 하지만 워낙 부드러워 베어다 돼지에게 주면 서걱서걱 잘도 씹어 먹습니다. 구렁 논이나 냇가에 지천입니다.
ⓒ 김규환^^^
 
 

달콤한 봄꽃 향기, 이글거리는 붉고 더운 여름꽃 향기는 온데 간데 없다. 싸하고 씁쓸하며 온몸을 감싸는 강렬한 취기(醉氣)를 느끼는 듯, 보드라운 봄 취나물을 씹은 듯 하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밑에서 주연(酒宴)을 베풀면 곤드레만드레 취해 어질어질하고 코끝이 찡하다.

푸른 창공 가벼운 하늬바람에 실려 코끝을 건드리고 길게 숨 한번 쉬면 가슴마저 저민다. 흰 이슬 풀잎에 맺힐 무렵부터 찬이슬 줄기를 감쌀 때까지 가을 들꽃 연주는 쉼 없다. 밭에 굵은 소금 뿌린 듯 메밀꽃 한창일 때 고향이든 알지 못하는 시골로 떠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침이나 해질 녘에 오솔길 걸으면 코로 맡으니 후각(嗅覺)을 깨우고, 대낮 푸른 기운에 반사되어 더 짙푸른 꽃을 시각(視覺)에 기대 맞이할 수 있다. 연노랑, 풀색, 초록색, 감색(監色), 보랏빛에 진홍, 다홍이 어우러져 사람 혼을 빼고 만다. 만지고 싶으면 꺾어서 해맑은 아이 머리핀 대신으로 해도 욕먹을 일 없다. 촉각(觸覺)을 넘어 족각(足覺)을 동(動)하게 하면 심각(心覺)마저 한통속이 된다.

 

 
   
  ^^^▲ 물을 먹고 자라는 갈대-정말 갈색이고 빗자루 재료로 많이 씁니다. 지붕 재료로도 많이 쓰입니다.
ⓒ 김규환^^^
 
 

장가 못간 두메 산골 불혹 넘긴 노총각은 토끼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가슴이 뛴다. 인기척만 있으면 집 앞으로 달려나와 20년 전 서울로 떠나간 여인이 올까 서성인다. 꿈을 같이 키워 오순도순 알콩달콩 살아보자며 맹서(盟誓) 했건만 영영 안 올 작정인가?

언제 질까 두려워 갈대, 억새, 들국화, 오이풀, 마타리, 싸리꽃 형형색색 한 무더기 모으고 칡꽃 넝쿨 둘렀건만 벌써 말라 비틀어져 시들었다.

가을꽃은 대체 몇 살일까? 나는 평생 17살이라고 하겠다. 강렬한 태양을 머금어 꽃의 중심에 노랑 암술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으니 아직 여물지 않은 나이임에 분명하다. 또한 곧 성인이 되어 세상만사 역경 기다리고 있어도 역시 천진난만하다.

제 혼자 푸른 꿈만 잔뜩 머금고 있으니 코흘리개 아이는 아니다. 볼그족족 여지곤지 바르지 않고 분칠하지 않았으니 잡티 서너 개는 멀리서도 확연하여 청순 그 자체다. 그러니 열일곱이라 하는 게 맞다.

 

 
   
  ^^^▲ 고향 추억을 묻어버린 저수지 가에 핀 며느리밥풀꽃
ⓒ 김규환^^^
 
 

시리다 못해 쓰린 가을 향기. 더위를 감내하다 해가 짧아졌다는 걸 알려 주듯 밤이슬을 더 많이 먹고 자라는 가을 들꽃. 들풀이라고 꽃이 피지 않은 게 없다. 우리는 잡초 들풀이든 산나물 꽃이든 들에 메뚜기 떼 날을 만한 가까운 거리 풀숲에 핀 꽃을 들꽃 야생화라 부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다르듯 향기도 철마다 다르다. 봄꽃, 여름 꽃, 가을꽃, 겨울 꽃이 제각각이니 차려진 맛이 다른 것을 자연에서 배운다.

‘메밀꽃 필 무렵’ 들에 나가면 돌아오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가 고향에 가서 머물고 싶은 까닭이다. 산천초목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걸까?

마취 당한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혀 제가 반기는지 내가 반가워하든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걸 어찌 잊으랴. ‘아마도 그리워 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리다.

 

 
   
  ^^^▲ 쑥부쟁이
ⓒ 김규환^^^
 
 

오이풀, 물봉선, 쑥부쟁이, 감국, 참취, 벌개미취, 미역취, 수리취, 며느리밥풀꽃, 마타리, 달맞이꽃, 참싸리, 메밀꽃, 고마니, 달개비 지천이다. 서둘러야겠다. 백과사전 없어도 눈에만 쏙 담아 가져 와서 책을 펼쳐보는 게 순서이리라.

단풍(丹楓)이 이보다 아름다울쏘냐? 가을 문턱을 넘고 단풍도 멋없을 흉년이니 들꽃이나 실컷 보아야겠다. 바야흐로 가을꽃 한반도 남단에 걸쳐 있다. 벌써 소금강, 내린천, 화양구곡, 뱀사골 굽이굽이 흘러내리고 섬진강 진주남강 햇살 마저 먹어 탐스레 피었겠다.

 

 
   
  ^^^▲ 밭가에 피어 있는 싸리꽃. 칡꽃도 비슷하지만 보랏빛이 더 진합니다. 둘다 콩과일겁니다.
ⓒ 김규환^^^
 
 

 

 
   
  ^^^▲ 억새와 오이풀
ⓒ 김규환^^^
 
 

 

 
   
  ^^^▲ 청색이 달개비. 노란꽃은 눈괴불주머니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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