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억기 장군^^^ | ||
이억기 장군은 1561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을 제수받았으며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21세가 되던 해인 1581년, 6진(6鎭)의 하나로 두만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던 경흥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583년 여진족이 대규모로 공격해오자 기병과 보병 300명을 변복, 적진으로 돌격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86에는 6진 방어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던 온성부의 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경흥 지방에 침입했던 여진족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던 조산보 만호 이순신(李舜臣)을 변호하여 백의종군토록 함으로써 이순신 장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억기 장군은 여진족의 침입이 극성을 부려 수많은 무장들이 파직당하고 처형당하기도 했던 1587년 말까지 6진의 요새를 성공적으로 지켜냄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억기 장군은 순천부사를 거쳐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었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준비를 돕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했으며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조정대신들에게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기도 했다.
장군은 임란 초기를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주요 해전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연합함대의 주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고, 3도의 모든 수군 장수들이 중도에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교체되지 않고 무려 6년 동안 전라우수사의 직무를 수행하며 큰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자 패전한 장수로서 깨끗한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 스스로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임란 후 선무공신 2등으로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1600년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1795년(정조19년) 의민(毅愍)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0월 2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이억기 장군의 후손을 비롯한 종중과 해군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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