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추리소설] 아내의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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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추리소설] 아내의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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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식당에서의 일이었다. 아내가 휴대전화를 두 개 사용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었다.

직장에서 퇴근한 아내와 근처의 식당에 들어갔다.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아내의 핸드백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는 순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히 아내의 휴대전화는 식당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벨소리는 분명히 아내의 핸드백에서 나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아내의 핸드백을 열고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내의 휴대전화와 비슷하게 생긴 그 전화를 열어보니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그는 혹시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지 않을까 싶어 서둘러 그녀의 전화를 열어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수첩과 볼펜을 들고 아내의 전화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난 뒤 그는 서둘러 다시 전화기를 아내의 핸드백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내의 핸드백 안으로 전화기를 집어넣고 난 뒤 잠시 그가 전화번호를 바라보면서 전화번호의 주인이 누굴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내가 나타났다.

웃는 얼굴로 걸어 온 아내는 그의 앞에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자 그의 머리에서 전화번호 생각은 잠시 지워졌다. 아내가 그에게 무슨 음식을 주문할 것인지 물었고 그는 아무거나 주문하라고 말했다.

아내는 주문이 끝난 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근무하는 회사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일 들,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에 대한 평가, 최근에 있었던 인사 이동에 대한 불만 등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다시 문제의 전화번호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미처 알지도 못하고 이런 저런 잡담을 계속 쏟아놓았다. 시간이 지나고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건성으로 식사를 마친 뒤 아내에게 갈 곳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했다. 아내는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내에게 아는 사람이 만나자고 한다는 이유를 둘러대며 아내를 뒤로하고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섰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아내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근처의 PC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아내의 휴대전화에서 찾은 전화번호만 가득 차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만 가지고 아내에게 전화한 주인공을 찾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불길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꼭 그 전화의 주인공이 아내의 불륜상대란 법은 없었다.

아내의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설령 남자라고 해도 불륜과 전혀 무관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애써 전화번호를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인터넷 신문 사이트에 접속해 건성으로 기사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전화번호는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더욱 그의 의구심을 자극하는 것은 아내가 휴대전화를 두 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생각을 거듭했지만 아내가 전화를 두 개나 갖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가방 속에 있던 전화는 뭔가 사연이 있는 전화임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게임에 열중하는 이들의 컴퓨터에서 나오는 게임 음향과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로 시끄러운 PC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가 전화를 두 개 가지게 된 이유를 생각하느라 주변의 소음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느 얼간이가 잃어버린 전화를 아내가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아예 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한 개 더 갖고있는 이유를 물어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아내가 무슨 답변을 할까 내심 두려웠다. 그는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몇 번 씩 고시에 실패하고 실의에 잠겨 있을 때 용기를 북돋아 준 것도 아내였고 지금의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아내였다.

지금의 직장을 소개해 준 사람이 아내의 집안 친척이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다. 지난 2년 간의 결혼생활 동안 아내와 한번도 다툰 일이 없을 정도로 그와 아내는 만족스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지금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2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내색 없이 직장에 갔다. 아내도 물론 함께 출근했고 아내와 그는 제각기 자신들의 회사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헤어졌다.

그는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지만 아내의 전화에 나와 있었던 전화번호에 대한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회사에 도착하면 집어들던 조간신문을 치우고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아내의 전화에 나와 있었던 전화번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전화에 있던 전화번호는 세원산업이라고 하는 회사의 전화번호였다. 그는 서둘러 세원산업이란 회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인터넷에서 '세원산업'을 검색하니 회사 웹사이트가 검색되었다.

그는 서둘러 세원산업 웹사이트에 접속해 회사에 대한 정보를 모두 찾았다. 세원산업은 전자 부품 제조회사로 그냥 평범한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그의 아내는 꽃배달 전문업체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전자부품 제조회사와 거래할 일은 없었다. 이것이 그의 의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세원산업의 회사 소개 페이지에 접속해 문제의 전화번호를 찾았지만 그 전화번호는 나와 있지 않고 회사 대표전화 번호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또다시 답답해졌다. 차라리 그냥 문제의 전화번호에 직접 전화를 걸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걸어 보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당신이 내 아내의 불륜상대가 아니냐고?

그는 건성으로 대강 일을 해치우고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동료들은 매번 하는 것처럼 이런 저런 잡담을 꺼내면서 식사를 했지만 그는 식사를 하면서도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한 채로 기계적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내의 최근 행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아내는 최근 몇 차례 야근을 한다는 핑계로 집에 들어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아내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컴퓨터 게임에 열중해 있다가 지치면 잠들고 다음날 알람시계에 맞춰 일어나 회사로 향했다.

그는 일을 끝내고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퇴근 후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직장 동료들의 제의도 뿌리치고 서둘러 집에 들어간 그는 들어가자마자 아내의 소지품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분명히 뭔가 실마리를 잡을만한 것이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는 아내의 화장대 서랍에서 라이터 하나를 찾아냈다. 라이터는 금으로 도금된 것으로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아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히 이 라이터는 남자의 물건일 것이고 그것은 곧 불륜상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머리를 짓누르는 배신감이 증오심으로 바뀔 무렵, 그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솟구쳐 올라왔다. 아직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정체 불명의 전화번호와 금으로 도금된 라이터 한 개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3

라이터를 찾은 이 후 며칠 간 아내의 행동에서 의심 가는 행동을 찾을 수 없었다. 아내의 핸드백에서 문제의 휴대전화는 사라졌으며 집으로 수상한 전화 한번 걸려온 적이 없었다. 아내의 퇴근은 언제나 이른 시간이었고 이따금 아내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도 언제나 아내는 꼭꼭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의심은 늦출 수 없었다. 아내에 대한 의심의 수위를 낮추려고 하기만 하면 문제의 전화번호와 금도금된 라이터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라이터를 갖고 있었지만 아내는 특별히 라이터를 찾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라이터를 몰래 아내의 화장대 서랍에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내가 라이터가 없어진 것을 알고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의심스럽게 보일만한 행동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미 한동안 갖고 있던 라이터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고 해서 아내의 경계가 누그러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아내 주변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가 알면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었으나 문제의 라이터와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이상 아내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자신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가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정확히 알고 난 다음에는 그가 아내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었다. 어떤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4

그는 개인적이면서도 남에게 드러내 놓을 수 없는 문제를 전문적으로 해결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어디서 그들을 접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아는 사람을 통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의 은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불건전한' 분위기를 가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모두 지극히 합법적으로 살아가는 소시민들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몇몇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미처 말도 꺼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심부름센터에 통화를 시도한 이후로 그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전래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기분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아내의 생활 또한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자면서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던 것을 상상하면서 분노와 당혹감으로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다. 마음이 산란해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술을 사서 마시곤 했지만 술이 가져다 주는 잠시의 기쁨보다 그 이후에 밀려오는 숙취와 같은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술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다 속칭 '전화방'이란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른바 흔히 '남성 휴게실'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성적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거나 성욕이 왕성한 남성들이 일정액의 이용료를 내고 들어가 전화로 연결된 여성 상대와 음담을 늘어놓으면서 즐기는 곳이었다.

그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중년의 남자 주인은 그에게 밀폐된 작은 방을 안내해주고 1시간 사용하면 된다고 살짝 귀뜸해 주었다. 그가 들어간 방은 전화가 한 대 놓여있고 소형 텔레비전과 비디오, 편안하게 생긴 푹신한 의자하나가 전부였다.

그 외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고 그 용도를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 한 통과 거울과 시계 정도가 전부였다.

그가 방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전화를 받았고 전화에서는 이내 젊은 여자로 추측되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그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말 까도 되지?"
"......"
"왜 대답이 없어?"
"......"
"내가 싫어?"
"......"

생면부지의 낯선 여자, 낯선 여자가 반말로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왜 숨소리만 내고 있어? 뭐라 말 좀 해봐."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순간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전화번호와 라이터, 문제의 전화번호와 라이터를 단서로 문제를 추적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 여자가 그런 정보를 알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로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란 사실을 폭로해 버리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내 말을 좀 들어봐."
"그래, 뭔데?"
"내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아"
"그래, 안 됐네."
"......"
"그래서 여기 나와 재미보는 거야?"
"......"
"이런 데 처음이야?"
"......"
"쫄았구나?"
"......"

잠시 망설이던 그는 참았던 말을 꺼냈다.

"심부름 센터 알아?"
"심부름 센터?"
"사람 뒷조사 같은 거 해주는 데 말야."
"......."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그동안 참아왔던 말이 봇물 터지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누라를 뒷조사하고 마누라하고 놀아났던 놈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그러자면 아내를 감시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할 수는 없단말야. 그러니까 그 것들을 뒷조사해서 단서를 잡을 수 있는 심부름 센터 같은 것, 뭐 그런 종류의 뭔가를 소개해줘."
"......"

말이 없었다. 그는 아마 상대방 여자가 웬 미친 놈인가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데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저 이런 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자극적으로 흥분시키며 놀다가 생각없이 나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때 상대방이 답변을 시작했다.

"좋아, 화가 많이 났겠네. 구체적인 건 알고 싶지 않고 내가 아는 곳이 있어. 뒷조사 전문에 적당한 보상만 있으면 확실히 해결도 해줘."

그녀는 '해결'이란 말을 강조했다. 해결, 그것은 그도 절실히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지?"
"388-3999"
"388에 3999"
"응, 388에 3999"
"알았어, 고마워."
"고맙긴."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는 주인에게 이용요금을 치르고 웃는 얼굴로 서둘러 거리로 나갔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주인은 즐거워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미 단단히 본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5

문제의 전화번호로 찾은 곳은 서울 변두리 주택가에 위치한 건물의 사무실이었다. 영림기획이란 상호를 쓰고 있는 이 사무실은 '기획'이라고 하는 상호와는 별로 관계없이 보였다.

좁은 사무실에는 책상 하나와 소파가 집기의 고작이었고 그 흔한 컴퓨터 한 대도 없었다. 그가 문을 열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어찌 오셨습니까?"

이곳이 일종의 조폭 사무실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흔히 요즘 조폭들이 적당한 상호를 가지고 사무실을 차려놓고는 각종 범죄를 수행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조폭 복덕방이란 곳까지 성업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들었던 차라 그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리 험상궃게 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키가 185센티 이상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남자는 전화통화에서 협조의사를 밝혔던 대로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6

남자와의 만남이 있고 일주일 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걸어 온 주인공은 예전에 만났던 남자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황급히 뭔가 꼬리가 잡혔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전화로 긴 말 할 수 없고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곧장 남자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는 남자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가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사진 몇 장을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차라리 편안했다. 그는 사진을 보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 안은 남자와 그의 숨소리만이 들릴 따름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물었다.

"이 자의 정체는 뭡니까?"
"아직 파악중인데 문제의 전화번호의 주인 같습니다."
"그렇다면 회사원입니까?"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라 세원산업이란 회사의 중역쯤 되는 모양입니다."

중소기업의 중역이라. 그는 중소기업의 중역이란 아내의 남자의 지위와 자신의 지위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회사의 말단 직원인 자기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었다. 사진에 나온 생김새도 제법 괜찮은 인물이었다.

"어떤 처리를 원하십니까?"

그는 망설였다. 지금 갖고 있는 사진 만해도 아내를 궁지에 몰아넣기는 충분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아내가 자초한 잘못이다. 만일 아내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 남자의 아이인가. 아니면 내 아이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좀더 생각한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그는 남자에게 작업 착수 후 바로 지급한 선금 외에 남은 액수를 내일 남자의 계좌로 입금하기로 하고 서로 헤어졌다.

7

아내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아내와 얼굴을 마주 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내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자기가 못나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가까이 했다는 자괴감 비슷한 감정에서 기인하는 열등감이 그를 괴롭혔다.

대체 자신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는 방구석에 앉아 자신의 단점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서울시내 4년제 대학 졸업 학력으로 특별히 나을 것 없는 학벌, 특별히 못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집안 형편, 역시 특별한 것 없는 외모, 무엇보다 언제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성적 능력이 먼저 떠올라 그의 머리를 괴롭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올라 그의 머리를 짓눌러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불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현실적 판단이 그를 자제하게 만들었다.

복수를 하리라.

일단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먹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면 누구를 복수의 목표로 삼는단 말인가. 아내를 복수의 목표로? 아내를 복수의 목표로 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쓸데없는 살생을 벌이는 것은 싫었다.

아내는 어떤 남자의 함정에 빠진 것이리라. 아내는 선량하지만 결국 문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아내의 남자친구인 것이다. 아내의 남자친구만 처단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는 아내의 남자친구를 죽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아내의 남자친구를 죽이기는 하겠지만 직접 죽이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일단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없어 두렵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살인을 하고 난 뒤 발각될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다. 살인이란 문제는 역시 그 방면에 탁월한 소질과 능력, 경험을 가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살인청부의 경우 상당한 비용이 소요될 것이겠지만 그것은 아내 몰래 집을 담보로 잡혀 대출을 받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추궁해오면 그때는 이미 갖고 있는 사진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아내를 역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역공을 받은 아내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집이 담보가 되고 그 빚을 못 갚아 집이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문제의 그 사악한 작자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집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둘러 전화를 걸어 아내를 감시했던 남자에게 만날 것을 청했다. 남자의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는 시간과 날짜, 그리고 만날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8

남자는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것이며 적절한 인물을 섭외해 일을 맡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자는 그에게 이번 일을 절대로 다른 이에게 말해서는 안되며 혼자 무덤까지 갖고 가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엄중 경고했다.

만일 이번 일이 누설될 경우에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까지 말했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알았다고 약속했다. 그가 굳게 약속하자 남자가 비웃는 듯한 느낌을 주는 차가운 웃음을 약간 보였다.

얼마 안 있어 남자의 표정은 예전의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되돌아 왔고 은행계좌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착수금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 남자는 그 말을 끝낸 후 자리를 떠났고 남자가 필요로 하는 착수금은 그의 집을 담보로 잡혀 나온 돈 가운데 일부의 금액으로 다음날 바로 입금되었다.

착수금이 입금된 이후 그는 평온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결국 사악하기 짝이 없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십계명 가운데 중요한 계명 가운데 하나가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천벌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살인청부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살인청부를 하고 난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 원하는 제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해졌다. 제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돈만 받고 청부업자가 잠적한 것인가. 그때 그는 살인청부를 중개한 남자가 보였던 비웃는 듯한 차가운 웃음을 떠올렸다.

상황이 궁금했던 그는 서둘러 살인청부를 중개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고 다시 만날 장소와 일시를 지정해 주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9

약속장소로 나가자 남자가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고 남자에게 곧바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실패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이리 더딥니까?"
"적당한 때를 봐야 성공하는 법이지요."
"......"
"이런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뒷탈이 큰 법입니다."

남자의 말에 그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히 일이 잘못되면 살인교사죄로 자신도 같이 처벌받을 수 있었다.

"적절한 시점을 찾았습니다."
"......"
"당신 아내가 머지않아 출장을 떠날 겁니다."

아내가 출장을 떠난다는 말은 맞았다. 아내의 회사에서 간부급 직원들 몇몇을 지방의 연수원에 보내 간단한 워크샵과 함께 지방의 꽃배달 전문업체들을 돌아보게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아내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때 그 자도 같이 그곳에 가게 될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당신 아내의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는 자가 바로 당신이 처리하고자 하는 그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해 당신이 노리는 그 자가 당신 아내 회사의 투자자란 말입니다."

그는 그제서 이해가 갔다. 아내와 아내 회사의 간부들이 지방의 꽃배달 업체를 둘러보게 되는 것은 적절한 회사를 인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회사 인수를 위해서는 돈이 있는 투자자가 필요했으므로 투자자도 같이 워크샵에 참석해 경영방안을 논의하고 인수대상으로 떠오르는 몇몇 기업을 둘러볼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아내가 결국 돈 있는 남자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 깊이 숨어있던 열등감과 배신감이 일순간에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 마음을 그와 함께 있는 살인 청부를 중개한 남자에게 들키기 싫어 서둘러 숨겼다.

"어떻습니까? 그 자를 제거하는 장면을 같이 보지 않겠습니까?"

그는 순간 뭔가 가슴에 맺힌 딱딱한 것이 일순간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자를 함께 제거할 수 있습니까?"
"손님은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
"뒷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10

그 자를 잡았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 자를 잡아죽이고 근처 야산에 암매장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했다. 그에게는 특별히 이미 사망한 그 자를 파묻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짜릿한 흥분을 느겼다. 그는 보겠다고 승낙하고 약속한 야산 근처로 승용차를 몰고 갔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각은 밤 10시였던 데다 인적이 없는 야산 주변이어서 그는 두려웠다.

그가 차를 세우고 주변을 서성이며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며 살인청부 중개인이 나타났다.

"같이 갑시다."

그와 중개인은 같이 야산으로 걸어 올라갔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 손전등 불빛에 의존해야 했다. 한 30분 가량 올랐을까. 숨이 차기 시작한 그는 중개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갑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대화가 끝난 뒤 그들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제법 평평한 장소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더 올라가야 합니까?"
"아니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
"여기 시체를 묻을 구덩이도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청부업자와 그것은 왜 오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이라니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 네."

중개인은 답변이 없었다. 그때 밑에서 손전등 불빛으로 보이는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손전등 불빛은 한 개였다. 살인청부업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이 무거운 시체를 갖고 있으면 청부업자의 움직임이 둔해야 하는데 청부업자의 움직임이 매우 빨랐다. 그것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의 남자친구는 어디 있소?"

자신도 모르게 그는 중개인에게 물었다.

"......"

중개인은 대답이 없었다. 손전등 불빛은 점점 그들과 가까워져 육안으로 손전등을 가진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중개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버둥거리면서 소리치려고 했지만 중개인의 억센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신 아내의 남자친구가 돈이 더 많더군. 그리고 우린 당신 아내의 남자친구에게 당신을 미끼로 돈을 더 뜯을 수 있어."

손전등 든 남자가 그와 중개인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전등을 그와 중개인의 얼굴에 비추자 그는 중개인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중개인은 예전에 그에게 보였던 차가운 비웃음을 다시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그 비웃음이 예전의 그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심장을 손전등 든 남자가 휘두른 칼이 찔렀다.

그는 얼마 안가 숨이 끊어졌고 신원이 드러날 만한 물건과 옷가지를 모두 약탈당한 채 알몸으로 구덩이 안으로 버려졌다. 두 사내는 근처에 숨겨놓은 삽을 꺼내 '시체'가 들어있는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구덩이가 메워 진 후 그들은 '시체'의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받을 빳빳한 현찰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개인은 그를 죽이고 난 다음 그를 발가벗기는 과정에서 나온 금도금된 고급 라이터가 손전등 든 남자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까운 느낌이 들어 약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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