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사태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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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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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9일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 탈취를 기억하라!

 
   
  ^^^▲ 5.18 광주사태 자료사진^^^  
 

5.18 30 주년을 앞두고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5.18 진실규명을 위해 앞장서 온 역사학도, 강재천님, 이주천 교수님 등 그리고 특히 필자에게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힌다"는 <세상바로잡기>란을 마련해주신 뉴스타운 손상윤 회장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역사학도님은 오늘 5.18 수사기록을 발췌 필자가 예비군대대에서 광주사태발발 6일동안 부대에서 고립되어 대대장과 16명의 현역을 비롯 향토예비군과 방위병, 그리고 휴가 중 귀대를 못하고 대대로 피신온 휴가병 7명 등 60여명이 31 향토사단소속 나주예비군대대를 사수하고 서남부 11개시군에서 계엄군의 광주시내진입을 차단하고 이미 19일자 나주예비군대대 무기고를 피탈, 무장하고 광주로 진입하는 차량들을 이곳 나주에서 차단했다.

또 역사학도의 수사기록 자료를 통해 "31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오전10시 나주예비군대대 폭도 도착시 행동지시와 함께 오전 11시 31 사단은 나주예비군대대로부터 보고받고 부대근처 1백미터지점 민가에서 폭도정탐 활동중'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 당시 진압부대였던 31사 기록을 알려주었다.

아래 체험수기는(11회) 30년전 필자가 본지<김동문의세상바로잡기>란에 5년동안 연제했던 체험수기의 원문 기록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옮긴다.

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1)
헬기가 나타났다! 헬기가..

초창기에 지급되었던 미군 씨 레이션은 한끼 분이 1 달러(한화270원)를 웃돌아 1인 한달 급식비가 90불로서 우리가 받던 전투 수당의 두 배가 되는 5십만 달러의 거액을 정글속 전선에서 특별식인 씨 레이션을 내 던지고 식초가 된 김치 통조림과 돼지털이 든 햄까지 먹어가며 고국의 부모형제들을 위해 국산 조변화 꿈을 이뤄 냈다. 월남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정 소령이 냉수 한 컵을 건네 준다.

48 시간을 뜬눈으로 밤 을 세우고, 21일 새벽 을 알리는 동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한줌의 쌀이 절실하다. 식량 보급 지원을 위해 수 차례 무전 교신을 했지만 응답이 없다. 시민군의 무장 차량은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데도 사단에서는 나주가 광주로 향하는 전초 기지가 된 것을 몰라서 일까? 아니면 서북부 장성, 담양, 화순 지역과 동부쪽 여수, 순천, 고흥, 보성 쪽의 진압이 더 급박해서 일까? 무전 교신이 두절된 터라 더욱 불안하다.

대대를 찾아온 이틀째 오전 8시 대대장실 일반 전화가 처음으로 울렸다. 잽싸게 수화기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나주 군청 내무과장의 전화다. "대대장님 내무과장이요 군청 직원들은 모두 철수하고 읍내는 이미 치안 부재 상태요" 라며 자신도 숙직실 인근에 숨어서 전화를 한다고 한다. 고향 선배인 0과장께 신분을 밝히자 그 역시 크게 놀랜다. 대대장을 바꿔줄 사이도 없이 식량 지원을 부탁했다.

긴박한 사정을 들은 내무과장은 보내줄 인편이 없음을 걱정하며 최선을 다 하겠다며 통화를 끝냈다. 오늘 점심때까지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60여명의 장병들은 꼬박 하루를 굶는 셈이다. 내무 과장의 식량 지원 여부에 따라 부대 사수와 철수를 결정해야 하는 절박한 상태에 놓였다. 대대장도 오늘 새벽 철조망 경계를 하던 예비군과 방위병들의 불평에 이들의 동요와 부대 이탈을 걱정한다.

빈총을 움켜쥐고 세끼식사도 못한 병사들과 부대를 사수한다는 게 무모한 일 같다. 이때 정문 경계를 하던 현역병이 대대장 실로 달려와 희소식을 알린다. 정문 언덕길로 수레를 끌고 오는 농부를 발견 했다는 낭보와 함께 부대 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 온다 한다.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내무과장이 보내준 식량이다. 사복으로 갈아 입은 예비군 서너명을 데리고 수레 쪽을 향해 뛰어갔다. 우리는 구세주를 만나듯 수레에 실린 혼합 곡 포대를 끌어안고 환호성을 치며 곧바로 취사장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식사 준비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대장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다. 초여름의 문턱에 선 5월의 계절 탓인지 이틀만에 시래기국에 식사를 하고 나니 조름이 찾아온다.

이때 고함을 치며 무전병이 취사장 쪽으로 뛰어온다. "대대장님 대대장님 무전이 잡혔습니다! '무전기를 건네받은 대대장은' "여기는 갈매기 여기는 갈매기" 갈매기 0호다. 긴급 식량 지원 바란다." 급한 나머지 수신 버턴을 누른 체 수없이 되풀이 한다. 수 차례나 반복되는 식량지원 요청에 "알았다 오버" 라는 한 마디로 교신은 성공 한 셈이다.

군청 내무과장이 보내준 혼합곡 여섯 가마와 연대의 무전 교신이 이뤄지자 부대 분위기는 크게 변했다. 철조망 경계를 하던 예비군들이 내 고향 내 고장은 우리 손으로... 향토 예비군 노래 가락을 힘차게 부른다. 21일 오후 4시 갑자기 부대 앞 폭도들의 진지에서 총성이 요란하더니 부대 상공에서 헬기 한대가 부대 쪽을 향해 날아온다.

폭도들이 쏘아 대는 총알을 피하느라 높이 고공 비행으로 부대 쪽을 향해 접근해 온다. 연병장 상공 에 이르더니 더 높이 고공을 선회하며 부대 앞에서 쏘아 대는 총격으로 착륙을 못한 체 선회를 반복하고 있다. 내무반으로 달려가 하얀 이불시트를 헬기를 향해 마구 흔들어 주었다.

착륙 안전지대의 표시다. 수분의 시간이 흐르자 헬기는 서서히 연병장을 향해 내려온다. 연병장은 5백여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헬기에 탑승 한 두 명의 병사가 실어온 보급품을 내리는 사이 대대장과 나는 헬기 쪽으로 다가서자 소령이 조정간을 잡고 있다. 헬기는 M60 기관총과 실탄 상자가 내려지고 이륙을 서두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면서 주변이 흙먼지에 시야를 가린다.

나는 대뜸 이륙준비를 서두는 조정석의 소령에게 이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조종사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이륙을 서둔다. 조정간을 잡고있던 소령을 향해 칼 빈 소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식량을 내려 놓아라" 칼 빈 소총을 들이대며 고함을 질렀다. 기다렸던 식량대신 기관총과 실탄 상자만 가져온 헬기 조종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본인은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나주대대에 중화기 수송명령만 받았을 따름이라며" 총구를 의식하고 낮은 자세를 취한다.

그는 계급장도 없는 군복차림의 내 모습을 보고 특수부대나 자신보다 상급자로 비춰졌는지도 모른다. 식량 대신 중화기만 내려진 체 이륙을 서두는 항공대 소속 조종사에게 잠시 화풀이했던 나는 사과의 뜻으로 그의 안전 이륙을 위해 양팔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헬기를 보내고 대대장실에 들어서니 벽시계가 오후 5시를 알린다. 나는 정 소령에게 떠도는 유언비어들을 신중하게 정리해 보자며 의견을 나눴다.

누가 먼저 무장하고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

폭동을 자인하는 사적비(史跡碑)의 정체?

'역사의 유적과 역사가 남긴 발자취들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승키 위해 사적비를 세운다' 며 1980년 5월 19일 광주사태 당시 최초로 무기고 탈취사건의 중심지였던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 앞에 세워진 사적비의 전문을 공개한다.

5.18 민중항쟁 사적1호: 예비군 대대 무기고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시민학살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다수의 시민들이 군용차량을 이용하여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M1소총, 칼빈소총 그리고 다수의 수류탄 등을 획득하여 무장하고 획득한 무기의 상당수를 광주로 이송하여 광주항쟁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다.<비문내용>

위 사적비는 1980년 5.19일 오후 3시 계엄군의 광주진입 이틀전에 피탈된 무기고(나주 금성동 소재) 금성동 파출소 나주예비군대대 본부 무기고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데 95년 김대중 정부때 설치된 사적비 원문이다.

소총 1600여정 M60 기관총을 비롯 다량의 수류탄이 탈취된 시간은 5월 19일 오후3시 사이며, 군용차량 표기는<아시아자동차 방산업체>에서 탈취한 차량이며 무기고 피탈시간대를 이틀후인 21일 계엄군 발포로 시민학살이 되고있어 무기를 든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 사적비가 곧 광주사태 당시 계엄군에 앞서 시민군이 무장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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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0-05-13 05:17:58
역사학도 그 함평사람 이름은 서oo입니다 2010/05/11 17:47:13
김동문 기자님, 안녕하세요.
나주 경찰서 무기고 무기 탈취는 영암 사람 김00와 박00과 유00이 인솔한 500 여명의 폭도들이, 그리고 금성파출서 무기고 무기 탈취는 박창남과 유00과 임00가 앞장에 선 100 여명의 폭도들이 하였습니다.

이어 20 여명의 폭도들(당시 남민전 점조직이었던 카톨릭 농민회 회원들)을 인솔하여 나주군청으로 쳐들어간 함평사람은 서00이었으며, 어쩌면 함평사람 노00도 동행하였을 것입니다.
역사학도 금성파출서 무기 피탈 사건 목격자 2010/05/11 17:47:49
의견 글쓰기에 300 자 제한이 있군요.

함평사람 서00과 노00는 영암사람 김00에게 시켜 무기탈취 특공대가 나주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 광주공원에 집결하여 무기 분배를 하게 하였습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금성파출서 무기 피탈 사건을 이 준위님께 알려주신 첫 목격자가 바로잡기님이셨는지요.

바로잡기 그렇습니다. 80년5월19일오후1시-3시사이 금성동파출소옆나주예비군대대무기고가 피탈된 현장 150미터지점 사무실(전남매일신문 나주지사)에보안부대책임자000준위와 저, 그리고 피신온 나주경찰서 정보과소속친구0모경장등 3인이 무기고피습현장을 목격하고 예비군대대에 긴급연락 피탈된 무기의 현황을 파악했고 그곳에서 피탈된 엠60기관총이 전남도청에 장착된 것입니다. 2010/05/11 17:57:06

역사학도 금성파출서 무기 피탈 사건 기록 2010/05/11 19:29:57
아! 그랬군요. 공소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년 5. 21 14:00경 전남 나주읍 금성동 파출소에 침입, 성명 불상 폭도는 군용 트럭 후미로 동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문을 들이받아 이를 파괴하고 동 박00은 칼빈 소총 4정, 동 유00은 칼빈 소총 1정을 들고 나오는 등, 엠원 소총 200여 정, 칼빈 소총 5백정, 총탄 50.000 여 발을 가져와 이를 약탈하고," (공소장 45권)
역사학도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였군요 2010/05/11 19:40:34
공소장 기록이 애매하여 저도 혼동했었습니다. 공소장에는 "동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라 적혀 있는데,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였군요. 정확히 말해 파출서 무기가 아니라, 예비군 대대 무기고였습니다. 그래서 엠60기관총같은 중장비가 있었던 것이었군요. 그런데, "예비군 대대 무기고"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는 궁금합니다.

역사학도 함평 고구마 사건 주동자들이 무기 탈취 계획 주동 2010/05/11 19:56:14
카농은 이미 5월 9일 무기 탈취 계획을 완료해 놓고 있었습니다. 혹시 1978년의 "함평 고구마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함평 고구마 사건"을 계획한 카농 조직이 남한측 무기 탈취 주동자들이었는데, 본래 예비군 접수 예정일이 5월 19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9일이란 날자가 중요합니다. 아마 무기 탈취 계획이 완료된 날을 21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주에서는 19일부터 시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잡기 어떠한 무기고도 출입통제지역으로 특히 군부대 무기고는 브록담으로 위장되어있고 무기고는 적벽돌로 튼튼하게 만들어진4평규모의 고정건물로서 무기고란 표시는 금기사항으로 해당지역 예비군들이 훈련후 보관하는 곳이며 금성동파출소 이웃에 위치했고 관리책임자는 육군소령인 대대장정소령이 관리책임자입니다. 사태후 대대장은 무기고 피탈책임을 물어 저와함께 광주진입하는 서남부11개시군의 시민군을 차단하는 공로를 세우고도 사태후 강제 예편되었고 나주경찰서장(김상윤총경)도 책임 2010/05/11 20:08:47

역사학도 그 점이 중요합니다 2010/05/11 20:56:38
그렇다면 민간인들 중에는 그 지역 예비군들만 알 수 있는 곳이었겠군요. 사실은 저는 여러 차례 예비군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우리 동네 어디에 예비군 무기고가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습니다. 만약 예비군이 무기고에서 직접 무기 분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예비군조차도 모를 수 있겠네요. 그런데 타지역에서 온 김대중의 사조직 김00가 정확히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바로잡기 더욱 중요한 사실은.. 2010/05/11 21:42:37

79년 광주-목포간 고속화도로신설로(완공후 대중도로로 불리기도했슴)폐쇄된 나주읍 경현동소재 채석장이 폐쇄되었는데 그장소에 남겨진 발파용 다이너마이트(폭약)가 버려진 창고에 보관되어 있을것으로 판단 화순광업소 폭약탈취이후 나주까지 폭약을 취득하려고 복면부대가 19일자 나주에 왔다는 사실을 이미 역사학도님이 제게 알려주었지요,

바로잡기 나주예비군대대 무기고가 피탈되던 날 2010/05/12 03:07:04

1980년 5월 19일 오후3시-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가 피습되고 1600여정의 총기가 탈취되던 날!
신의주1호선인도로에는 삽시간에 각목과 쇠 파이프 그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장발족의 청장년들이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체 요란한 함성을 지르고 목포 와 영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역사학도 힌츠페터가 광주로 들어온 길 2010/05/12 05:42:12
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4526119 에서 보시면 5월 20일 힌츠페터가 광주로 들어오던 날 무장단체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KBS는 이 무장단체가 총기무장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군용트럭들만 보여주지만, 영어원문에는 총기무장에 대한 증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길이 어느 길인지가 중요한 단서입니다. 아마 나주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은 아닐 것 같은데, 바로잡기님이 한번 동영상을 봐 주시겠어요?

역사학도 나주쪽 아니면 화순쪽 길? 2010/05/12 06:14:04

그 동영상은 시민군이 21일부터 무장했다는 5.18측 주장을 뒤집는 증언인데, 20일의 이 무장단체에 대한 호칭 문게가 있습니다. 광주에서 시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광주로 들어온 무장단체에 시위대란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이 무장단체가 20 일에 어디서 여러 대의 군용트럭을 확보하였는지가 수수께끼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무엇하다가 광주로 들어간 것인지도 매우 궁금한 문제이구요. 혹 화순으로 연결된 도로는 아니었는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나주 방향 도로인지 화순 방향 도로인지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바로잡기 한츠페터가 광주로 들어오던길은? 2010/05/12 07:45:14
1, 화순에서 노릿재터널을 이용 지원동-학동-조선대와 도청-금남로로 진행하는것.화순-광주16키로)
2,, 장성-광주간26키로구간.
3 나주-광주 (27키로구간.
4, 송정-광주간12키로구간,등 4개도로망 가운데 위동영상에서 확율이 높은쪽은 4번송정-광주간 도로로 보이며(노

바로잡기 이어서 2010/05/12 07:46:23
4개도로망 가운데 위동영상에서 확율이 높은쪽은 4번송정-광주간 도로로 보이며(노폭이가장넓은쪽)이구간에는 광주비행장-상무대 전교사-방산업체인 아시아자동차공장등이 인접해있고 특히
*나주-송정간(12키로)구간에는 19일이후23일까지는 시위차량들이 자유로 래왕하던길이며 당시 나주에서 탈취한 무기와 군용차량등에 탑승한 자칭 시민군들은 송정 공군비행장 인근까지 접근 비행기를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려 당시 참가했던 시위대가 처벌을 받고 지금은 5.18민주화유공자로변신한 사례가 있습니다.

역사학도 송정 공군비행장=광주비행장 2010/05/12 15:39:27
첨부할 수 있는 동영상 파일을 찾고나서 와보니 이메일 주소를 방금 삭제하셨군요. 혹시 송정 공군비행장을 광주비행장이라고도 부르는가요? 전에 "광주사태의 진실은"이란 수기에서 "진도 시민군" 명찰에 대해 증언해 주셨는데, "월산 제 2동 지도원 동무"라는 완장에 대한 증언도 있습니다. 300자 제한 때문에 아래칸에 인용합니다.

역사학도 “월산 제 2동 지도원 동무”라는 완장 2010/05/12 15:42:35

"진도 시민군" 명찰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도 수상하고, 남한에서는 지도원 동무라는 완장을 차지 않습니다.

바로잡기 송정공군비행장 VS 광주비행장 2010/05/12 16:19:46

송정공군전투비행장과 광주비행장(공항)은 동일 장소에 있으며 공동사용하고있습니다.
한츠페터기자의 동영상은 역사학도님 블러그에서 확인했기에 이메일 주소를 삭제했습니다.

바로잡기 사태이후 폭도검거령에따라 A급.B급. C급. D급분류로 판정 구속과 훈방처리를 했는데 당시 나주경찰서에 검거된인원은 대부분 훈방처리가 되었는데 김대중정권에서 이들을 민주화유공자로 민주화운동으로 2010/05/12 16:30:52

으로 승격 국가유공자 반열에 올려 놓을 당시 그들끼리 인후보증으로 민주화유공자를 생산 지금은 이곳 나주에서도 200여명의 국가유공자가 탄생 했습니다.

역사학도 나주 예비군 대대는 31사 소속 2010/05/12 16:38:33
나주 예비군 대대가 31사 소속이었군요. 31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학도 나주에 가서도 시체 2구로 시체 장사 2010/05/12 16:50:56

카농이 21일 새벽 6시부터 시체 2 구를 리어카에 싣고 차로 끌고 다니며 광주에서 시체 장사하여 20 만명을 도청광장으로 끌어모은 후 10시에 그 시체 2 구를 차에 싣고 나주로 떠났습니다. 나주에서 또 시체 장사하며 무기 탈취한 후 3개조로 나뉘어 김00가 이끄는 한 조는 무기를 광주공원으로 실어와 무기 분배하였고, 김00이 이끄는 한 조는 영암을 거쳐 해남으로 갔으며, 다른 한 조는 목포로 갔습니다. 아무래도 그 때 그놈들이 그 시체 2구를 버리고 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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