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19시간 귀성버스 타고 온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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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19시간 귀성버스 타고 온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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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와 80년대 귀향 길의 다른 풍속도 2> 귀성버스

 
   
  ^^^▲ 귀성버스-짐칸 부족 현상 극심. 다리 밑에도 깔고 갑니다. 안내원 자리도 사람이 탈 때가 있었죠.
ⓒ 김규환^^^
 
 

이농(離農), 탈농(脫農)의 시대 서울로, 공장으로 떠난 청춘들

68년 생들과 함께 32명이 졸업한 초등학교 동창.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돈을 벌러 떠났다. 1/3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로 갔다. 상고, 공고로 진학시킨 것만도 큰 맘 먹은 부모들 덕에 고교를 마칠 수 있었던 친구들과 몇 안 되는 아이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은 4명에 불과했다.

우리 동창은 그래도 위 형제들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 돈을 벌어 부치는 통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갈 수 있었으니 복 받은 세대다. 네 명만 간 게 아니다. 네 명씩이나 대학에 갔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마을이 생긴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호남 인구가 대거 이농(離農)을 하여 서울 등 수도권으로 몰리던 70년대. 80년대 초반까지 농촌은 텅텅 비어갔다. 한 집 당 자녀 예닐곱 명과 어른 두 명은 기본이었던 때니 나주와 김제 너른 평야 지대와 몇 몇 어촌(漁村) 빼고는 고향을 버리고 ‘성공해서 다시 오마.’고 고향 산천을 눈에 담고 다짐하며 떠났다.

전남북, 광주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온 사람이 어림잡아도 현재 600만 명의 절반인 300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 긴 행렬에 내 형, 누이, 일가친척, 이웃사촌, 친구들도 끼어있었다. 남아 있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 집도 두 번이나 출향(出鄕)을 시도한 적이 있다.

칠팔 명은 기본이었고 많을 경우 어른들을 2대 모시면 열 두셋의 대가족이 된다. 대식구가 소작이나 빈농(貧農) 상태, 1,000평 남짓 논밭으로 먹고살기는 힘겨웠다. 광주나 전주로 가면 될 터지만 여천공단과 이리공단(현재 익산) 뿐이었다. 두 곳도 수용엔 한계가 있는 작은 공단에 지나지 않았다.

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일제시대에 가출을 세 번 시도하여 결국 집에서도 포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장남이었으니 어른들의 만류는 더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였다. ‘전답을 모두 물려 줄 테니 남아서 농사 지으라.’던 부모님의 꼬임과 회유와 협박, 불호령을 뒤로하고 옷가지 한 벌 챙겨 친구든 먼 친척에게 돈을 빌려 너도나도 취직할 곳을 찾아 도망치듯 떠났던 것이다.

 

 
   
  ^^^▲ 한 때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중심이었던 서울운동장
ⓒ 서울시^^^
 
 

차림새 말투 확 바뀌고 으스대며 부모님께 잘 산다고 거짓말하던 시대

기어이 서울까지 와서는 끌고 내려가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니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도시로 내뺀다. 그래서 낯선 이역(異域) 천리 서울, 수원, 성남, 광명, 안산, 안양,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마산 등지로 떠났다. 처녀 총각들은 공장에 마련된 서너 평 이내의 기숙사에 새우잠을 잤다.

공중변소가 생길 무렵이 이때다. 너도나도 산동네, 천막촌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삼양동, 미아리 일대와 신당동, 봉천동이 그곳이요, 성남 상대원동이 ‘광주대단지 사건’의 계기가 되듯 물밀 듯이 들어와 천막 치고 아무데나 깃발 꽂고 살았다.

서울에 가면 뭔가 대단한 돈벌이나 근사한 행세라도 하는 것처럼 떠벌리는 이도 많았다. 뿐인가? 말투도 6개월이 안되어 ‘그랬니? 어쨌니? 저쨌니?’ ‘얘는...’ ‘네’나 ‘녜'로 근사하게 바뀌어 온다. ‘거시기’와 ‘시방’이라는 전라도 공용어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서울 수돗물을 먹으면 까만 살갗은 2달이면 뽀얗게 된다. 그러나 그 뿐이다. 햇볕을 얼마나 볼 수 없게 일을 부려먹었는지 살결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다. 식수에 표백제라도 탔던 걸까?

부모님 안심시켜 드리려고 ‘엄마, 직원이 저 밑에 50명이 넘어요.’ 하는 말에 어른들은 동네방네 한 마디 씩 툭툭 뱉으며 자랑하고 다닌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아주머니들은 자신의 자식과 비교하면서 열 불이 나고 화병(火病)이 도지기도 했다.

소위 ‘3D 업종’이라 불리던 생산직, 노가다(건설 일용직), 버스 차장, 식모와 보이(뽀이)가 다수였던 산업통계를 들추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상상력으로도 그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 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런데도 거짓을 일삼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 동양고속터미널이 있었던 동대문종합쇼핑 앞 주차장에서 바라본 동대문운동장.
ⓒ 김규환^^^
 
 

수구초심(首邱初心), 귀향(歸鄕)의 꿈

대개가 이렇다보니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과 큰아들, 큰댁은 시골에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절마저 건너뛴다면 불효자로 낙인찍히기 쉬웠다. 그게 두려웠을까마는 일년에 두 번이라도 가지 않고는 살맛이 없게 된다. 한 달 전부터는 꿈에도 나타난다.

아무 때나 후딱 다녀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상황도 허락하지 않는다. 여름 휴가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때라 명절 빼곤 고향 땅을 밟아 볼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다. 아플 때 잠시 내려와 쉬었다 가는 사람 외엔 정말이지 고향에 계신 부모님 뵙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니 추석과 설 때는 반드시 귀향전쟁을 치러야 한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기차라면 몰라도 버스에서 지내는 긴 하루는 간혹 24시간을 넘겨 그 다음날 오전에야 도착하는 수가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드러누워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 누워 있을 필요도 없다. 고향에 가면 만나야 할 사람, 보고 싶은 풍경이 좀이 쑤시게 한다. 공기도 맑아 이내 피로를 털고 일어난다. 집 한 바퀴를 돌고 동네 고샅마다 둘러보며 잘 들 있었는가 확인하기에 바쁘다.

 

 
   
  ^^^▲ 우직하게 서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어머니와 귀여운 동생들...
ⓒ 김규환^^^
 
 

80년대 초반까지는 기차로, 중반 이후는 향우회 대절 버스로

70년대가 기차길 따라 열차에 몸을 실어 내 맡기던 풍경이었다면 80년대는 귀향 버스 시대다. 구로공단 회사에서도 통근버스를 지역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마을마다 버스 한 두 대를 미리 예약한다. 큰 마을은 네 대 까지 마련하여 고향으로 간다.

버스 앞에는 <화순북면 양지2호>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였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현재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뀜) 건너 덕수상고(구, 동대문상고 현재는 행당동으로 이전) 터 주변과 청계천 동대문종합상가 주차장에 있던 동양고속터미널, 평화시장이 집합 장소였다.

각자 꾸러미 서너 개씩 메고, 양손에 들고 오는 풍경엔 행복이 넘실거렸다. 아가씨들은 핸드백에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각기 굽 높은 원색의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 입술이 도시 물 먹은 티가 난다. 건장한 청년들은 까만 구두에 번쩍번쩍 광을 내고 양복을 차려 입었다.

고향에 닿지 않았는데도 버스로 몰린 고향사람 만나니 싱글벙글 실실거린다. 아침 7시가 출발 시각인데도 이래저래 오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 초조하게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코리안타임’을 적용하지 않으면 달리 내려갈 차편을 구하지 못해 귀향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니 기다리지 않았다가는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야, 오랜만이다.”
“그래 잘 지냈냐?”

나중에 온 사람 짐을 받아 짐칸에 실어주고 둘은 두 손을 맞잡더니 부둥켜 껴안고 상대의 등을 토닥거린다. 후배는 동네 형들에게 90도로 머릴 숙여 깎듯이 인사를 한다. 사람들마다 ‘경북능금’이라 써진 사과 짝을 한두 상자씩은 사온다.

“안녕하세요?”
“어어, 누구시더라...”
“저 정환이 오빠 동생 정임이예요.”
“아 그래요. 아가씨가 다 되어서 몰라보겠네.”
“잘 지내셨죠?”
“어디 살어?”
“번동에요.”
“참 정임이가 숙녀가 다 되었네.”

 

 
   
  ^^^▲ 아직도 88올림픽고속도로는 왕복2차선-편도1차선입니다. 대구와 광주가 그리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김규환^^^
 
 

사과 짝 싣고 양복에 미니스커트 차림. 아침나절부터 싸구려 양주까지 마시는 청년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주변 가게에서 소주 한 박스, 맥주 세 박스를 실어 놓았다. 몇 몇 주당들은 호주머니에 '나폴레옹'과 '캡틴Q' 등 저가 양주를 숨겨 두고 있다. 아침나절부터 친구 선후배간에 술잔이 오간다.

주고받고 건네며 오징어와 문어다리 찢어 질겅질겅 씹고 바삭바삭한 새우깡 안주 삼는다. 몇 잔이 오가자 술이 넘쳐 바닥에 넘쳐흐른다. 출발하기 전에 이미 차안에는 술 냄새 진동한다.

거기다 스무 살만 넘으면 쭉쭉 빨아대는 담배연기에 여자들과 아이들 원성이 대단하다. 차창을 열어 놓아도 별로 나아진 게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같은 마을 오빠, 친구, 동생들이 피워대는 담배요,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흘리는 술인 것을.

9시가 되어서야 타야 할 사람들을 다 태우고 한남동 고개를 넘어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간다. 서울 시내가 막히지 않았는데도 1시간 반이 걸렸다. 맥주와 소주를 짬뽕으로 마시더니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은 소변이 마렵다고 한다. 기사 아저씨는 서초동 인근 고속도로 변에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웠다.

 

 
   
  ^^^▲ 뻥 뚫린 고속도로. 8차선이어도 막히니 원...대책이 없죠 뭐. 도로 늘어나는 양보다 차량 대수가 더 급속히 늘어납니다.
ⓒ 한국도로공사^^^
 
 

전 국토는 주차장 호남고속도로 최악의 상황-대전까지 9시간 30분

왕복 4차선인 경부고속도로는 이미 주차장이다. 판교 서울요금소(현재는 성남시 궁내동에 있지만 예전에는 <만남의 광장>에 있었다.) 부근까지 오는데 2시간, 수원 도착에 2시간, 천안까지 2시간, 회덕인터체인지를 돌아 나오는데 2시간이 걸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속도로(低速道路)에 서 있다시피 하니 아스팔트에서 뿜어대는 열기와 차량 내부 사람들의 체온으로 가을 선선한 바람도 당해내지 못한다.

수원부근 기흥 간이 정류장에 사람이 꽉 들어차 길가에 세워두고 볼일을 먼저 본다. 오후 2시가 넘어 향우회 기금으로 마련한 점심을 나눠주고 차에서 먹는다. 먹는 건지 밀어 넣는지 모르겠다. 우유와 요구르트 한 개씩도 돌려졌다.

회덕에서IC를 빠져나와 편도 1차선 도로로 접어든다. 이곳부터 호남으로 가는 철도도 단선(單線)이다. 기차는 대전역을 거치지 않고 서대전역에서 경부 호남이 갈린다. 어느 교통 수단을 이용하든 전라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고생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도로는 좁은데 80년대 초반을 시점으로 부지기수로 불어난 자동차 때문에 고향 풍경 줄줄이 펼쳐있지만 더디기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바로 옆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버스엔 거북이가 그려져 있었다. 서대전 논산을 거쳐 익산까지 3시간, 전주 1시간, 정읍-장성 2시간, 광주 1시간 30분, 집까지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유성IC 부근에서 국도로 빠지려다 포기하고 만다. 어차피 1차선인 것을 돌아서 갈 필요도 없었고 이미 국도 1호선(신의주-평양-개성-서울-수원-천안-신탄진-유성-논산-익산-전주-장성-목포 등 곡창지대를 죄다 통과하는 도로. 일제의 만행이 여기에도 이른다. 수탈을 위한 도로가 국도 1호다. 아직도 정읍 이하 장성 구간은 편도 1차선임)도 포화상태다. 차들이 꿈쩍 하지 않는다.

한 숨 자고 일어난 남자들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사람마다 불러가며 노래를 시킨다. 콩쿠르 대회 전야제가 펼쳐지는 셈이다. 노래 잘 하는 사람에겐 술을 상품으로 건넨다. 잘 불러도 한 잔 못 불러도 술을 마시는 풍성한 마음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기나긴 여정. 경부고속도로만 빠져나가면 확 뚫리리라 기대했건만 역시나 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실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간혹 아이나 울며 보챌 뿐이다. 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젊은 아주머니만 힘들다. 이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께 첫 인사들 드리러 가는 길이다. 고향 어르신께 드리는 한가위 최고 선물이다.

 

 
   
  ^^^▲ 학교 다닐 적에는 콩나물시루에 간신히 몸을 올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500미터쯤 가다보면 헐렁해졌습니다. 키 작은 저는 광주에서 3시간 동안 남의 품에 안겨 간 적이 있습니다.
ⓒ 김규환^^^
 
 

차가 뒤집어져 복병이 도사리고 있고 씨름하다 되돌아가니 새벽 4시

도합 17시간 30분이 걸려 담양군 남면(무등산 뒤쪽 광주댐, 식영정, 소쇄원, 독수정원림 가는 길)과 화순군 북면 경계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온 가족 친척이 모이는 걸 시샘이라도 하는 걸까?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심란하게 한다.

“빵빵”

관광버스가 멈추어 섰다. 예기치 못한 복병이었다. 좁은 도로에 비에 미끄러졌던지 9인승 봉고차가 도로 한가운데 대자로 뒤집혀 가로막고 있다. 넥타이 풀 여유도 없이 양복 겉옷만 벗어두고 건장한 청년 모두 나가 차를 들어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1시간 여 실랑이를 벌이느라 깔끔하던 셔츠는 기름 범벅이 되었다. 1시간 가량 되돌아오니 고속도로가 보인다. 평소 다니던 옥과 쪽으로 돌았다. 광주 아래서만 3시간이 걸렸다.

차 한 대 지나가기 힘든 좁은 시골길을 대형버스가 조심조심 바퀴를 굴린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이 차를 몰고 기어가는 운전사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곡성과 화순 경계인 성덕재 를 넘을 때부터 재경향우회 총무와 무슨 말이 오갔다. 필시 ‘이런 험한 길은 더 이상 못가겠다.’는 말을 하니, 사정을 해서 ‘4km만 더 가면 된다.’했을 것이다. 버스가 나갈 때 몇 만원은 인심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어둡던 마을에 붕붕 차 소리가 들리고 대낮같이 환한 불빛을 비추니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객지(客地)에서 19시간을 걸려 집에까지 온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 시간에도 어머니는 따듯한 밥을 차려주고 한 숨 붙이셨다. 우린 형, 누나와 아침까지 사랑을 나누며 밤을 밝혔다. 동녘 하늘에 먼동이 터 온다.

 

 
   
  ^^^▲ 호남고속도로에 차가 많은 이유를 아십니까? 서울서 부산 가기나 광주 가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리는 대구와 거의 똑같은데 말입니다. 호남사람들은 기차를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 한국도로공사^^^
 
 

기다림의 미덕 그리고 귀성행렬에 합류

형, 누나가 내려온다고 하면 꼴 베는 일 빼곤 아무 것도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학교 갔다와서는 오후 두세 시부터 어귀에 마중을 나간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려 보지만 열 번을 넘게 나가보아도 감감무소식이다. 이르면 밤 9시에서 보통은 11시였다. 무슨 사고라도 난 듯 어른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자다 깨다 몇 번을 뒤척였던가.

87년부터는 나도 귀향 행렬에 합류했다. 그 지긋지긋 하다던 머나먼 고향 가는 길. 떠나는 며칠 전부터는 공부도 되지 않았다. 부모님, 설렘, 그리움, 추억, 고향, 친구, 시골, 고향마을이 아른거려 재경향우회 총무를 맡은 둘째형을 도와 귀향버스 계약과 밑지지 않기 위해서 표 예매를 서둘렀다.

갓 스물 넘은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해댔다. 또래별로 임시 모임을 갖고 귀향버스를 이용할 것을 종용했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芳里) 꽃다운 마을 양지로 가는 버스는 대형 두 대였다. 45석 한 차로는 사람이 넘치고 두 차는 자리가 남아돌았으니 옆 마을 사람들이라도 태워가야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빠르고 편리합니다. 문제는 도시까지는 잘 가는데 그 다음에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들어가는 차가 하루 1~2대 밖에 안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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