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그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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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와 그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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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으로의 여행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운 가곡 '그집 앞'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오래도록 자주 불렀던 것 같다. 이 노래를 부르면 지금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애써지 않아도 저절로 펼쳐지는 영상들이 있다. 기억이란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 것이던가.

바로 어제 인듯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아득히 멀어져간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내 고향 집,좁은 골목길을 휘돌아 나가면 내 눈길이 머물곤 했던 어느 집의 돌담. 돌담 너머로 얼핏 보이는 감나무와 아주까리 나무, 그 아래 있을 까까머리 소년의 방,거기선 이따금 기타 소리에 실린 '로망스'가 흘러 나오곤 했다.

비오는 날, 음악 시간에 듣던 슬픈 사랑 이야기 인 '소나기'. 약간 허스키한 여자 교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실 창 밖을 바라보는 나. 비를 맞고 있는 텅빈 운동장, 운동장의 변두리에 선 플라타나스 나무, 그 넓은 잎새들의 빗물로 내는 아름다운 하모니카 낮은음 소리, 숨죽이며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눈망울을 빛내며 듣고 있는 숨죽인 반 아이들의 모습들.

그리운 시절이다. 왜 이렇게 커버렸을까. 어느새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기억은 아직 선연한 빛깔을 띠고 있는데... 몇 일 동안 맑음 이더니 젖은 대지를 뽀송뽀송 말려 놓는가 싶더니 다시 비다. 어젯밤 늦게부터 시작된 비는 오늘은 세차게 퍼붓는다.

'소나기'와 '그집 앞'과 함께 떠올려지는 까까머리 소년은 지금은 나처럼 어디에선가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어딘가에서.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처세를 터득해 가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가난 했고 늘 허기가 졌던 소년은 빨리 어른이 되서어 성공해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 가는 길에도 갔다 오는길에도 소년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학교 갔다오면 소년은 어김없이 소를 몰고 들로 나가거나, 혹은 작은 어깨에 지게를 짊어지고 (거름더미나 나뭇짐이 얹혀있었다)들로 나가거나 했다.

소년은 늘 허기가 져서 키가 작았다. 소년은 큰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였다. 소년은 언제나 외로웠다. 소년은 시나브로 배가 고팠다. 몸도 마음도 허기가 졌다. 그런 소년의 손에는 생의 동앗줄인 양 책이 들려 있었다. 소년은 꿈이 있었다.

세상의 그 어딘가에서 좌초된 꿈을 안고 여느 사십대의 사내들 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소년이었던 그의 가슴 저 밑바닥에는 순수했던 시절의 좌절된 꿈 하나가 아직도 별처럼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고향에 갔을 때 소년의 소식을 들었다.

사업을 한다고도 했고, 다단계를 해서 망했다고도 했다. 풍문에만 소년의 소식을 들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성공하고 싶었던 소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잘 되기를 바랐다. 가난하고도 힘들게 살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땅히 잘 되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잘 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 하며 잘 살기를 바랐다.

그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향 친구 남편의 부음을 듣고 병원 영안실로 달려 갔던 날, 소년을 만났다. 마흔의 나이에 이른 고향 친구들 사이에 알은체를 하며 다가오는 소년-내 눈에는 아직도 그가 소년으로 보였다.현재의 그로 보지 않고 기억 속의 그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였다. 살아 가면서 누구나 겪는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 낙담과 체념이 현재의 그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그늘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도 마흔 살 이었다. 무엇이든 이제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고 ,죽어라고 미워 하던 사람도 용서 할수 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가지게 되는 사십대 였다.

젊음의 치기와 열정이 빠져 나간 뒤의 조금은 초라하고 겸허를 아는 나이.인생이 내 힘과 열정 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좀 더 자신에게 조차도 너그러울 수 있는 나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여느 사십대의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아이 낳고 키우면서 아내와 맞벌이 하면서 가정의 울타리를 엮으며 살고 있는 듯했다.

다만,그의 헐거워진 어깨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그의 체념어린 눈 빛에서 깨어진 꿈의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다 깨어진 꿈 하나쯤은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비가 아직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나왔다. 잘 살아라 하고 악수라도 하고 올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나왔다. 각자의 삶의 무게만으로도 무겁기 때문일까. 굳이 그런 인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으로의 생(生)에 따사로운 햇볕만 비쳤으면 좋겠다.

어둠 속으로 차는 달렸다. 비는 차창 밖을 은빛 별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서는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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