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풀빵, 그리고 바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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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풀빵, 그리고 바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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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슬레'의 무노동 무임금, 노조의 경영권참여 배제원칙

외국계 기업인 한국 네슬레가 2개월 가까이 파업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3일에 청주공장 등에 대한 직장폐쇄 신고를 제출했는데, 그 이유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노조의 경영권 참여 배제라는데 그 무게가 있어 보인다.

일 하지 않는데 임금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서, 파이를 나누어 먹는 문제는 늘 노사간의 대립관계를 가져온다. 이익창출 권리와 그에 상응하는 근로 대가 관계가 늘 생기기 때문이다.

노동자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으로 일할 때 불려지는 이름이다. 하지만 70년대에 이러한 노동자가 산업 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추켜세워지면서 혹사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종업원이라는 말로 불렀다.

이러한 노동자는 자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노예와는 다르게 안정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어느 자본가 밑에서 노동력을 밑천으로 해서 살아 갈 수밖에 없기는 하다.

자본가들은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하면 투자자본의 손실을 보게 되는 점을 우려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힘들게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내려고 해서 늘 다툼이 생긴다. 그래서 때로는 힘이 약한 쪽이 손해를 보게 되지만, 이러한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며 한계가 된다.

그래서 서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면, 어느 때인가는 줄이 끊어져서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필요악이지만, 타협점을 빠르게 찾고, 협력하는 관계가 일어나게 되면, 모두에게 보다 많은 이익을 주지만 이 시각에도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전태일과 풀빵, 그리고 바보회

전태일, 하면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노동운동의 기수, 농민의 아들, 풀빵, 바보회 같은 것들이다. 70년대의 노동자들은 거의 농어촌출신이었다. 그들이 도시로 나와서 노동자가 되었으나 노동의 원리가 무엇인지도,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일만 열심히 했다.

대개가 어렵게 자란 사람들이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 하며 직장에 다녔다. 그래서 기업주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마음껏 부려먹고,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주면서 가혹하게 일을 시켰다.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때여서, 사업주가 노동관계법률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고, 지킬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래서 무지한 노동자들은 임금을 떼이고, 길거리로 쫓겨나서 헤매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모든 귀책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곤 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죄라고 하며, 그야말로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을 빼고는, 산업 역군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 당시에 수백만 노동자가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못나서, 사장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고 하며,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자책하면서 참고 일했다.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라는 말을 입증하려는 듯, 노동자들이 자포자기를 하는 것이 팽배했고, 다른 곳에 가보아도 마찬가지여서, 나아질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했다. 그러한 시기에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그것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1964년 봄에 겨우 16세의 나이였다. 평화시장의 한 직장에서 미싱 보조원으로, 하루에 14시간 이상을 일하면서, 철야와 잔업을 밥먹듯이 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점심은 굶거나, 1개에 1원씩 하는 풀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며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에게서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그는 그 말에 한줄기의 광명을 발견한 듯, 희망과 환희를 가지고, 젊은 재단사들을 모아서 '바보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평화시장 일대의 3만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정한다.

열악한 근로조건 실태를 알기 위해서 설문지를 돌리다가 곳곳에서 업주들에게 발견되어서 그들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정부기관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에게 고발을 하였지만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전태일은 좌절해서 고뇌한다가, 방송에 의뢰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어떤 기자의 호응을 얻으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고, 서울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에 대한 참상이 매스컴에 보도되게 되었다.

이것이 전태일이 맨주먹으로 시작한 노동운동의 성과가 되어서, 이를 계기로 당당하게 자기들의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22세가 되던 해인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거리에서 노동자들 약 50여명과 경찰이 충돌했었다.

그 때에 그는 꽃다운 나이에 석유를 몸에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서 꽃다운 인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 노동운동사의 한 단면이다. 역사 학자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그 뒤로하고, 한 젊은 청년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못해서 자기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사건이다.

그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72년에 동일방직 노조가, 73년에 반도상사 노조가, 75년에는 와이에치 노조 등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와이에치 무역에서 또다시 사건이 생긴다. 이 회사는 가발 산업의 사양화와 경영부실, 업주의 재산해외 도피 등으로 폐업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되자, 정부에서 공권력을 투입하려고 했다. 이에 맞서 1979년 8월에 신민당 당사에 여성 노동자 180여 명이 들어가 농성을 하던 중에,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김경숙 노조간부가 맞아서 죽었다.

이러한 투쟁사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다. 30년이 흘러간 지금에 와서 보면 아픈 상처들이 많이 있지만, 원질적인 문제는 노사간의 이해득실 관계에서 출발하고, 늘 발생할 소지가 상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문제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IMF 사태와 구조조정으로, 다시 실직하게 된 노동자들

1996년 4월에 김영삼 대통령은 "노조는 투쟁과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의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30여명으로 구성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에 근거하여 정부는 노동법 개정으로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제, 변형시간 근로제 등의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해서, 다시 노동계가 이를 반대하며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법이 96년에 12월 26일 새벽에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전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가 김영삼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었고, 그 다음해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서 참가자와 경찰이 충돌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130명, 대구에서 171명이 연행되어 갈등이 증폭되었지만, 97년 11월에 세계경제 불황의 도미노 현상이 한국을 강타하였다.

외환부족으로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가 급락하면서, IMF에 200억 불 정도의 유동성 자금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파탄으로 IMF라는 사태가 발생하여서, 다시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목소리를 낮추게 만들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길거리로 내 몰리게 되었고, 정부의 빅딜 정책에 의한 재벌기업의 구조를 개편하기 위해서 사업교환을 감행했지만, 결국은 노동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어 일자리를 잃게 되는 현상이 생겼다.

정부는 다시 정책목표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내세웠지만, 이 역시 노동자들을 임시직이나 일용직으로 재취업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가장의 실직, 생활규모의 축소, 채무의 증가. 보증채무로 인한 재산소진, 이에 따른 이혼증가, 가족파괴, 노숙자 등의 출현으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러한 여파가 계속되어서 현재에도 신용불량자가 무려 350만이나 되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놀고 있는 실업의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일용직, 임시직, 계약직, 파견근무, 시간제, 도급제, 하청 등의 노동자로 전락한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한편으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도 대우가 전만 못하다는 이유로 노동쟁의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하고, 지금까지 다소 덜했던 생계형 범죄와 자살도 급증하고 있다. 소득격차도 크게 벌어져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커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상호협력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협력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 않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에서 협동과 연대가 가장 중요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이익창출과 분배관계, 상품화폐 사회의 모순, 정부시책의 관여정도 같은 문제로 늘 마찰이 상존하게 된다.

그래서 늘 그 타협점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선을 찾기도 쉽지 않다. 경제적 파업과 정치적 파업을 가리는 일도 쉽지 않고, 국가가 개입해서 문제를 다스리는 것도 쉽지 않다. 노사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는 문제도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어서 결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번의 네슬레 같은 외국 기업이 한국에서 철수하려고 하는 그 이유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노조의 경영권 배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시사점이 있어서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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