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도둑기차에 숨어들어 고향갔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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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도둑기차에 숨어들어 고향갔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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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와 80년대의 귀향길의 다른 풍속도 1>고향역

 
   
  ^^^▲ 기찻길
ⓒ 김규환^^^
 
 

70년대와 80년대의 귀향 풍속은 꽤나 달랐다. 70년대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기차를 타고 내려간 반면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잘 닦여진 고속도로 시대가 되었다. 1일 생활권이라 외치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70년대는 고향마을에 택시기사나 차를 한두 대 끌고 들어왔고 사장 님 차를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울퉁불퉁 돌길에 차가 들어오면 아이들은 차 꽁무니를 잡고 마구 뛰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자가용도 꽤 들어왔고 그게 성공의 잣대가 되기도 했다. ‘누구누구 몇 째 아들이 서울에서 사업이 번창하여 자가용을 끌고 왔다.’는 소문이 동네는 물론 옆 마을까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80년대는 향우회에서 마을별로 귀향버스를 1~2대 전세를 내서 내려 왔다.

호남지역은 도로사정이 가장 열악했다. 70년대는 어떻게든 열차 표를 얻어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열 몇 시간 걸려 집으로 간다. 당시는 전라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유일하게 호남고속도로였다. 편도 1차선 도로로 명절에 집에 간다는 건 무리다. 그래도 가야 하는 게 고향이었다.

호남고속도로는 1986년 9월까지 논산~광주 간 122.2㎞, 1987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광주~담양 고서 간 9.9㎞, 1992년 11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고서~순천 간 71.9㎞ 구간이 너비 23.4m로 확장, 개통되면서 전체 구간이 왕복4차선이 되었으니 고행길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중앙분리대가 없는 왕복 2차선이었다. 버스 타고 고향 한 번 가려면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 타고 가는 건 명절날 당일 아침에나 도착할지 의심스럽다. 차 타는 걸 포기하는 게 낫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야외 매표소에서 밤새 줄을 서서 완행열차 입석표 구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날치기 쓰리꾼에 건달 양아치가 활개를 쳤다. 장사꾼들도 몰려들어 장사진을 쳤다. 표 사는데 하루가 걸리기 일쑤여도 기차를 타는 게 안전하고 빨리 가는 방법이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표를 사면 다행이다. 표가 없어도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에 무작정 나와 임시열차를 타려는 사람 다수였다. 그래도 큰 여행용 가방을 하나 들고 양복 빼 입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급기야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청계천 어드메, 성수동 공단, 영등포 공단에 공돌이 공순이, 누구누구 사장님 댁 식모, 시내버스 차장 생활을 전전하던 우리네 형, 누이들은 부모님, 형제자매, 불알친구, 소꿉친구 만나려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망우역에서
ⓒ 김규환^^^
 
 

결단의 장소에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한때 이곳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곳이 어디냐 하면 ‘수색기지창’이다.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으로 오가는 모든 열차가 운행을 마치고 점검 차 24시간 돌아오는 선로가 100줄 가량이나 되는 허허벌판이다.

서울시 은평구 수색동 자유로 난지도 뒤편인데 철도청 소속 기관차 대부분이 점검을 받고 청소를 마쳐 경향각지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광주’나 ‘순천’ ‘목포'라는 글자만 보고 무작정 몸을 실어 몰래 열차로 들어가 화장실이나 화물차량에 쥐 죽은 듯 숨어 서울역까지 가는 행동을 감행한다.

경의선 가좌역, 신촌역을 느릿느릿 통과하다 정차하여 왁작지껄 소란해지면 안심해도 된다. 서울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타니 그 때가 되어 기어 나오면 되는 것이다. 플랫포옴에 서로 먼저 타려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되니 내부를 어찌할 도리가 없이 속수무책이다.

이 틈에 관리를 기대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는 화장실이나 객석 사이에 짐을 쑤셔 넣어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몸을 의탁하면 된다. 하지만 그 먼길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지 사람행세는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다. 주먹밥 두세 개 준비하지 않으면 배고파서 탈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탔던지 만원 버스와 비교할 수 없다. 남녀가 엉키고 노소가 어우러져 한 몸이 된 듯하다. 덥다고 보채는 아이, 오줌마려워도 맘대로 나다닐 수 없는 여성, 집에 가면 왕자나 다름없는 남자들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다. 선반에 올라가 자고싶은 심정뿐이다.

그 와중에도 아가씨의 날카로운 소리가 객실을 찢어 놓았다. “내 돈!” 복대에 칭칭 감아둔 빳빳한 1,000원짜리 두 묶음 20만원을 날치기 당해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둑놈 잡아라’ 한들 그 많은 인파에서 소매치기를 잡기란 불가능하다. 코도 베어 가는 판에 복대 하나쯤이야.

“엉~ 엉~ 엉~” 얼마나 서럽게 울어대던지 한 량에 탄 500명의 사람들 중 같이 따라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8살쯤 돼 보이는 아가씨가 설이 지나 여덟 달을 피땀흘려 거지처럼 살면서 모은 돈임에 틀림없다. 필시 소 한 마리를 사서 집안을 일으켜 보려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것이리라.

 

 
   
  ^^^▲ 맨드라미로 화전 부쳐 먹던 시절
ⓒ 김규환^^^
 
 

기적소리를 울리며 영등포, 수원역에 마저 사람을 싣고 천안, 서대전역을 거쳐 강경, 논산을 찍고 호남선, 전라선으로 갈리는 이리역(익산)에 꽤 오래 머문다. 전주, 정읍, 장성에서 목포 종점으로 가는 사람과 광주지선으로 빠지는 사람들로 나뉜다.

경부선 빼곤 복선(複線)이 되지 않았다. 단선(單線)에 왜 그리 역도 많던지 간이역 마저 쉰다. 10시간 넘게 타고나면 정말이지 이골이 난다. 다리 아픈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엉치뼈 마저 아파 오면 견디기 힘겹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에 화물차까지 지나가기를 무작정 기다린다. 길게는 5분 10분을 허비한다. 20분 대기도 감수한다. 움직이지 않는 차량에 꼼짝 않고 갇혀있는 신세가 되니 땀 범벅이 된다. 오줌 냄새에 사람 냄새가 진동을 한다. 세상에 교양 없는 사람 모두 모아 놓은 듯 난장판이다.

몇 차례 차장이 검표를 하러 돌아다니지만 싸움이나 말릴 정도지 검표는 무슨 검표를 하겠는가? ‘제 발 저린 사람’ 몇 명이나 잡힐 뿐이다. 종착역에 도착하고 나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 철로를 따라 걷다가 월담한다. 유유히 빠져나가는 기분 이런 기차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때서야 “휴~” 한 번 길게 숨을 쉬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친구와 후배들이 수천 수만이었다. 이렇게 까지 고생과 고행을 마다 않고 내려갔던 것이 70년대 고향이요, 명절이었다. 서울 인구의 1/3 이상이 호남 사람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으리라.

그 때 그토록 못 산 사람들을 두고 전라도 깽깽이들은 지독하다느니, 소위 꾼이 많다느니 하는 건 단편적인 판단이다. 사람마다 인격, 소양이 다를 뿐이다. 다소 지역 환경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요, 몸부림이었다.

더 억세게, 더 큰 소리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턱 자리를 차지하는 모양새가 그리 보였으리라. 이젠 그 생각을 고쳐 먹을 때가 되었다.

 

 
   
  ^^^ⓒ 김규환^^^  
 

국민가수 나훈아 씨가 부른 <고향역>을 한 번 불러보자. 이번 한가위에 다소 밀리고 힘겹더라도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다녀오자.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즐겁고 편안하게 다녀오길 바란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 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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